일을 시작한 지 한 주가 지나자 제법 서비스 요령도 늘고 손님들 면모도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손님들은 주로 주말을 이용해 3일 정도 머물다가는 경우와 휴가를 내어 일주일 정도 체류하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손님 리스트가 주어지는데, 손님 중에는 팁을 많이 주는 사람도 있고, 적게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팁이 후한 손님은 가능한 한 동선이 짧은 테이블로 좌석 배정을 미리 해두는 것이 중요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서 비스를 권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문이 다른 좌석에 비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는 식의 친절 서비스를 베푸는 것도 한 가지 방법 이므로 7]능하면 주방과의 서비스 거리를 줄이려는 계산으로 자리배정을 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손님들은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떠나는 날에 팁을 준다. 평균 20불 정도인데, 웨이터가 13불을 가지면 버스 보이는 7불 정도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팁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문화이다. 서빙해주는 사람에 대해 손님들이 감사의 마음을 돈으로 표시하는 성의이다. 그것은 주고받는 것(Give and Take)이 정확한 서구적 인 비즈니스 스타일이다. 팁문화가 현장에서는 봉급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실제 봉급보다도 팁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특히 봉급이 없이 팁으로만 살아야 하는 우리 같은 버스 보이들의 처지에서는 더욱 손님들의 성의 표시에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손님들을 많이 겪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팁을 많이 주는 손님들은 밑바닥에서부터 고생해서 돈을 번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계란을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은 사람들이 그런 부류이다. 전문 직종의 의사나 변호사들은 오히려 팁이 짠 편이다. 흔히 ‘과부 신세 홀아비가 안다’ 는 말처럼 밑바닥에서 맨손으로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마음 씀씀이가 넓은 편이다.
한번은 임 군의 테이블에서 한 주 동안 머물렀던 부부가 팁도 주지 않은 채 체크0!웃을 해버린 일이 생겼다. 공들여 일주일 간 서빙 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를 안 지배 인이 체크아^하고 나가는 손님의 차를 막고 팁을 받아왔다. 지배 인이 얼마나 지혜로운 분인가를 나중에 깨닫게 되었는데，자신의 수하 종업원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챙겨주는 모습이었다.
임 군의 팁은 봉사료가 아니라 일에 대한 급료나 마찬가지였기에 지배인이 악착같이 받으러 달려간 것이다. 무사히 임 군을 챙긴 후 그들을 변호했다.
“손님이 급한 일이 생겼는데 경황이 없어서 팁을 봉투에 넣어두었다가 잠깐 잊었던 것 같다. 결코 그럴 분들이 아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민족이라서 변호해주려는 느낌이 강했지만 그의 솔로몬 같은 지혜와 민족 사랑을 동시에 배울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인 손님이었다면 내가 그들에 대해 어떻게 말을 했을까를 생각하며 지배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우리는 월급이 없는 대신 숙식이 무료로 제공되지만, 손님에게 받는 약간의 팁이 유일한 수입이었다. 버스 보이는 대개 테이블 3개가 배정된다. 테이블 당 8명을 기준하면 만석일 경우는 손님 24명의 시중을 받아야 한다.
이 호텔의 특징은 어떤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고 손님이 원하는 것을 모두 만들어 주는 식당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주문하는 가짓수가 메인 요리 외에도 디저트, 와인, 음료수 등 수십 가지가 넘었다.
그러다 보면 손님 테이블과 주방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들락날락하는 고된 행보가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아침이 되면 늘 발이 퉁퉁 부어서 운동화가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종일 그릇이나 커피포트 등을 들고 다녀서 인지 팔과 어깨가 결리고 손목 관절조차 잘 돌아가지 않았다. 손도 부어서 인지 꽉 쥘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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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창빈, 박춘일(당시 초등학교 선생)과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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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손님 옷에 커피를 쏟았는데 아무리 닦아도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초조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일이 손에 익으며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대신 단순노동의 반복으로 심신이 지쳐갔다. 정신적으로 해이해지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팁을 주고 식당을 나서는 부유한 그들을 볼 때마다 언제 나도 저렇게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에 틈틈이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성공철학을 마음에 새겼다.
'Whatever the mind of man can conceive and believe, it can achieve(사람의 마음으로 인식되고 믿는 것은 성취할 수 있다).’
나폴레옹 힐은 성공을 믿는 자에게만 성공이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나는 성공하고 싶었다. 힘들 때마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면서 외치곤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성공한다.”
긍정적인 암시를 스스로에게 할 때마다 의지가 불타올라, 힘들어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신념이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몇 주가 지나자 일이 익숙해지고 식당 업무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일의 요령이 생기다 보니 아침에는 점심식사 테이블을 준비하고 나서 한 시간 가량 휴식할 여유가 생겨났다. 오후에는 저녁식사 테이블 준비를 마치면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겨 쉬는 시간에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도 했다.
우리는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일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무리가 되더라도 쓰리잡을 뛰기로 했다. 저녁 9시 경이면 식당 서비스는 마무리가 되기 때문에 그 시간 이후로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일했고, 마치면 커피숍에서 다시 일을 했다.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나면 거의 새벽 3시, 파김치가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빠듯한 쓰리잡 스케줄의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수면은 네 시간 정도로 견뎌야 했다. 육체적으로 고단했지만, 희망이 있어서 인지 견딜 수가 있었다. 누군가는 파도타기를 하면서 젊음과 낭만을 만끽하는 여름방학이겠지만 우리는 힘들었지만, 바닥에서 인생을 배우며 돈도 벌어 나름대로는 보람된 시간을 보냈다.
여름방학 동안 일해 번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게 되자,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떠나는 날 지배인의 격려에 고무되었다.
“수고했다! 언제든지 일하고 싶으면 와도 된다!”
미국에 와서 직접 현장에 부딪혀서 일을 배우고 백인 지배인으로 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대견하게 여겨졌다.
호텔을 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기분이었다. 고급 감옥에서 막 출소한 느낌이 었다. 주머니에는 이천 불가량의 돈이 두둑하게 들었고,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새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꿀맛 같은 자유였다.
임 군의 눈빛을 보는 순간 같은 마음이 통한지라,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외쳤다.
“가자! 뉴욕으로"
뉴욕은 젊음의 꿈을 받아 주는 도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