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임 군으로부터 솔깃한 말을 들었다.
“뉴욕에서 일하면 학비를 충분히 벌 수 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긴 여름방학 동안 뉴욕에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작정했다. 우리는 함께 떠나기 위해 소형 중고차를 구입했다. 어차피 떠나는 여정에 기름값이라도 보탤 요량으로 미국 학생을 구해 뒷자리에 동승시키기로 했다. 무척이나 마음이 설레었다.
뉴욕.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도 있었다. 속편한 친구들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학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동양인 학생들을 고용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내일을 앞두고 떠나기 전날 밤, 할머님께서 주신 성경책을 잡고 기도를 했다. 할머님께서 내 손을 잡고서 늘 해주셨던 성경 구절이 갑자기 떠올랐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다음날 일찍 네 사람을 태운 소형차는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네 명이 교대로 밤새 이틀을 운전한 끝에 뉴욕주의 사우스 팔스버그(South Fallsburg)에 도착했다. 그곳은 유태인들의 고급 휴양지였다. 돈을 벌려면 최고로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도 파인즈호텔(The Pines Hotel)에 취업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로 구성된 이 호텔은 유명한 리조트여서 나이트클럽에는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란 노래로 유명한 토니 버넷이 공연하는 곳이었다. 패키지 투어로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부유한 유대인들이었다. 호텔의 주인은 유대인인 스와츠코브 씨(Mr. Swarzcove) 였다.
음식도 코셔식 (Kosher Meal)으로 조리되어 나왔다. 처음에는 이 까다로운 식성의 소유자들에 대해 나름대로 분노도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살아온 우리와는 달리 그들의 까다로운 식습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괜히 돈 많은 자의 사치와 허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현장에서 직접 유대인 손님을 접하게 되면서 서서히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식습관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사회를 “Salad Bowl(샐러드 볼)”이라 보는 관점은 문화 다원주의를 지칭하는 사회학적 용어이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무조건 자신의 잣대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그들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과 알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지혜는 아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지식이나 체험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혜로 형성되는 것이다.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키워드를 쥐고 있는 유대인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이 가진 독특한 식문화의 핵심은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을 코셔(Kosher)라고 한다. ‘적절한, 옳은’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슈르트’가 어원이다. 코셔는 음식의 형태가 아니라 재료를 선택하고 다루는 법이다. 때문에 중국 음식도 유대인법 에 따라 만들면 코셔가 되고 베이글 같은 전형적인 유대인식품도 유대인법을 따르지 않고 만들면 코셔가 아닌 것이다. 엄격한 율법주의에서 나온 유대인의 생활문화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성공적 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 세기에 걸쳐서 문화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려는 그들의 저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최고의 호텔에서 내가 아르바이트로 할 수 있는 일은 웨이터를 돕는, 즉 버스보이(busboy)였다. 물론 서툰 영어와 경험 부족 때문에 중요한 서비스는 대부분 웨이터의 몫이었다. 최고급 호텔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종류의 음식들과 고급스런 인테리어, 모든 것들이 촌놈인 우리를 주눅이 들게 했다.
생전 서빙을 해 본 경험이 없어 간신히 받쳐 든 접시를 혹시 깨뜨리거나 손님 앞에서 커피를 쏟으면 어쩌나하고 긴장하다 보면 마음과는 달리 손이 수전증 걸린 노인처럼 더욱 덜덜 떨려서 몇 번이나 ‘진정하자, 진정하자’ 는 주문을 외웠다. 첫날은 온종일 긴장을 해서인지 군대 신병훈련소에 다시 입소한 만큼이나 피로했다.
불안한 하루를 겨우 마치고 숙소로 왔을 때는 거의 초주검이 되었다. 손과 발, 허리, 온몸이 결리고 내일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느낌 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지배인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해야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하는 동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다음날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깨었다. 지배인을 만나서 얘기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침 시작부터 지배인이 날 불렀다. 식당 지배인인 버니코브 씨 (Mr. Berny Cove)는 40대 중반으로 유대계 백인 남자였다.
“어제는 첫날인데 잘했어.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고.”
지배인이 먼저 격려를 해주니 그만두겠다는 말이 쑥 들어가 버리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시작이 반인데 앞으로 반만 더 하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갈 수 있다’
직원들은 업무 스케줄을 관리하는 지배인의 눈 밖에 나면 테이블 배정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 웨이터나 웨이트리스는 테이블 배정이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에 지배인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만큼 엄청난 권한이 있지만 까다로운 손님들의 입맛을 백 퍼센트 만족하게 해주는 완벽한 서비스에 대한 책임도 모두 지고 있기에 그 자리 역시 수월하지는 않았다.
흔히 유대인이라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같은 인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흔히 일수를 찍는 지독한 고리대금업자, 구두쇠이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돈 밖에 모르는 비정한 수전노로 유대인을 묘사했다. 유대인은 그런 선입견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을 받아온 민족이다.
하지만 유대 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어쩌면 그들의 처절한 생존력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의 성공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시 에서 비롯된 감정 인지도 모른다.
최고급 호텔의 안주인 슈와츠코브 여사는 매일 식당에 와서 점검했다. 주방에서 식자재 낭비가 없는지 철저히 감시를 했고, 식사 시간의 바쁜 와중에도 버스보이들을 일일이 검사하며 지적해댔다.
“주스는 컵의 7부 정도만 부어 서빙 하라니까!”
주문이 밀리고 바뿔 때는 그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데도 그럴 때마다 종업원들을 지적해댔다. 매일같이 식당에서 감독하는 그녀의 잔소리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군대의 선임하사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잔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일하는 종업원들은 그녀를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종업원 중에 버스 보이를 맡은 우리와 주방에서 일하는 중국인을 제하고는 모두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슈와츠코브 여사의 지적들이 일하는 그때에는 귀찮았지만 훗날 내가 직접 일선에서 경영을 하면서 다시금 생각이 났다. 그녀의 논리는 손님이 주문한 주스를 컵에 꽉 채우면 남길 양이 많아지고 만일 남기면 버릴 양만큼 낭비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7부만 부어주면 그만큼 절약이 된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잔이 서빙되는데, 일 년을 계산한다면 어마어마한 양이 절약될 것이다.
요즘의 라테 효과(Latte Effect)라고 하는 재테크 개념을 이미 그 무렵에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치열한 주방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라테 효과란 하루에 한 잔의 라테를 먹지 않고 연금 401K에 부으면 은퇴시점에는 백만장자가 된다는 재테크 계산법이다. 재테크에서는 물론 금액도 중요하지만 기간이 더 중요하다. 금액이 적다고 무시하지 말고, 소액이라도 꾸준히 저축하는 습관이 훗날 여유 있는 삶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이런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곳에서 직접 보게 되었다.
유대인의 성공은 1페니를 절약하면서 시작된다는 귀중한 철학을 파인즈호텔에서 얻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