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말기의 상해 (2회)
  제1장 상해(上海) 시절

내가 자란 남경로는 황포강변 영국조계에 속했다. 조계(租界)란 외국인이 행정 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이다. 1845년 11월부터 시작하여 약 100년간 일부 지역에서 지속된 외국인 통치 특별구이다. 처음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가 각각 조계를 설정했지만, 나중에 영미 열강의 조계를 정리한 ‘공공조계’와 프랑스의 ‘프랑스조계’로 재편되었다.

공공조계의 중심도로인 남경로는 금융과 서방세력의 본거지인 외탄에서 서쪽으로 쭉 뻗은 길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전차가 지나가는 상해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 인 그곳은 대마로(大馬路) 라고 부르기도 했다.

코트와 중절모를 쓴 신사와 화려한 양장을 갖춰 입은 여성들이 누비는 번화한 거리의 빌딩에는 조선인 미남 배우 김염(金焰)과 완령옥((阮玲玉)의 사진 대신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을 그린 『카사블랑카』의 거대한 포스터가 걸려 있고 담배광고와 화장품 광고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영미(英美)제 고급승용차가 달리는 길가에는 인력거꾼들이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이향란(李香蘭)의 「야래향(夜來香)J을 들으며 졸고 있는 풍경이었다. 밤이면 국민당과 중경으로 달아난 청방두목 두월생(杜月里)을 대신해 일본에 협조한 그의 잔당들이 은밀히 제왕노릇을 했을 것이다.

1930년대, 세계 6대 도시의 하나이자 동양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상해는 3백만 인구 중 외국인은 거의 10만이 육박했고 이들이 상해의 경제를 장악했다. 그러나 중일(中日)전쟁으로 1938년 일본이 상해를 접수했다. 상해는 복잡해져 인종 전시장이 되었다. 영미인이나 프랑스인, 공산혁명을 피해온 러시아인, 유태인, 중국인 자본가, 유민이 집중되었다.
 
▲ 상해에서의 유년기

일본의 서슬에 중국인 학교에서는 일본어가 필수과목이 되었다. 한국인과 대만인들은 일본인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한 반에 3, 4명 정도였다.
 
다행히도 나는 아버님이 중국인 학교에 넣지 않았다. 일본에서 유학하신 터라 일본어를 쓰는 학교를 외면하신 셈이다. 나는 영국계 소학교를 다녔다. 남경로 집에서 걸어서 10여 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영국계 소학교는 영국식 교육기관으로 1학년이라 반나절 수업을 했는데, 수학과 영어를 주요 과목으로 삼아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영국, 미국계 학생은 물론 중국인 학생들도 다녔다. 한국인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상해거리는 중국 근대의 유럽형 연립주택인 이롱주택(里弄住宅)이 늘어서 있다. 영국의 중국 침략에 의해 영국식 노동자 주택과 중국식 전통 주택 인 천정주택(天井住宅)이 절충된 건물양식이다. 상해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시절에 주거난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특별한 도시 주거유형으로, 한 동에 서너 채의 집이 합쳐진 모양으로 골목길에 면해 연립으로 지은 것이다. 연립으로 지은 터라 문루를 세워 멋을 주거나 서구형 석고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 상해 시절, 부모님과

인력거가 달리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길은 마차가 겨우 다닐 만하고, 3층 규모의 목조나 벽돌조 주택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그 길은 중국 특유의 가방(街坊)문화, 즉 골목길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어른들은 골목에 나와 담소를 나누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놀이터 구실을 했다. 그러나 다른 동네에 가면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었다.
 
어느 날 어머님의 손을 잡고 시내를 다녀오다 거리 구경에 정신이 팔려 손을 놓쳐 버린 적이 있었다. 복잡한 거리에서 인파에 휩쓸려 이내 미아가 되었다. 처음에는 기억을 더듬어 집을 찾으러 헤맸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자 복잡한 거리와 골목을 구분할 수 없어 덜컥 겁이 나서 무서워졌다. 어린 나는 지나가는 행인의 도움으로 경찰서로 인도되었다.

부모님께서도 종일 나를 찾아 나서셨다. 가까운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해놓았지만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도 연락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을 유괴해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성행하던 때라 부모님들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한밤중이 되어서야 연락을 취해 두었던 경찰서 에서 미아를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경찰관이 준 호떡을 먹고 있을 때 부모님이 헐레벌떡 달려오셨다. 어머님은 나를 안고 목 놓아 우셨고, 아버님에게 무척 혼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따금 손자들을 보면 어릴 적 미아가 되었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이 염려해 주시던 모습이 아직 기억에 생생히 살아 있어 콧등이 찡해진다.

 
  마도(魔都)로 가는 열차 (1회)
  상해 뒷골목의 개구쟁이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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