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버린 국경
나는 북한 방문을 앞두고 며칠 밤을 잠을 못 이루었다.
‘드디어 조상의 고향 평양으로 가는구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던 그 시절의 감격은 남북 분단으로 허망하게 사라지고 전쟁으로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휴전선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버린 후 조부모님과 부모님들은 생전에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시지 못한 채 세상을 뜨셨다. 어쩌면 북녘이 고향인 모든 실향민들의 심정도 같으리라.
통일을 염원했던 김구 선생의 진심이 반세기가 지나서야 받아들여졌는지 한국 정부가 비로소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 남북공동선언’에 의해 이산가족 상봉이 구체화되었다.
대북한 관계에서 대립과 갈등을 벗고 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해보려는 정부차원의 노력은 해외에 사는 많은 동포들에게도 고무적으로 보였다. 남북 관계의 해빙무드와 때맞추어 미주 총연에서 주관하는 산업시찰단 북한 방문을 신청했다. 당시 나는 총연의 고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밝힌 것처럼 대북정책에서는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립 구도였던 남북 관계의 긴장완화가 가져온 시대적 변화 속에서 북한 당국은 낙후된 경제를 재건해 볼 심산에 재미동포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고자 하는 의도로 방문을 허가했다.
5월 21일 임창빈, 강행시 회장 등 미주 상공인 30여 명이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우연히 북경 공항에서 김진홍 목사(두레교회) 일행을 만났더니 방문 목적을 귀띔했다. “북한의 트랙터가 낡아 정비공장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는 길입니다:”는 목사님 일행과 같은 고려항공(Air Koryo)을 타고 선대(先代)의 고향인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내리니 한국의 I960년대 김포공항처럼 시설이 낙후되어 보였다. 우리는 해외동포영접국에서 나온 안내원의 영접에 따라 평양 만수대언덕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을 참관했다. 높이 20미터에 달하는 동상은 위압적이었다. 평양에 오는 해외 방문객들은 반드시 데려와 참배를 강요하는 북한 여정의 필수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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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님과 평양행 비행기 탑승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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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거리는 깨끗했지만 사람들이 뜸해서인지 한산했다. 거리에 늘어선 낡고 빛바랜 공동주택들이 썰렁하고 음침한 느낌이랄까, 그런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옆방에 있던 강행시 회장이 잠시 내 방을 들렀다가 물었다.
“여기는 다리미도 없냐?”
나에게 한 소리였는데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었더니 여성 종업원이 다리미를 들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다리미를 받고 문을 닫고는 도청장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았다.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 (Big Brother)가 떠올랐다. 나는 강 회장과 중요한 말을 할 때는 귓속말을 해야 했고, 가능하면 말조심을 했다.
TV는 정규방송이 주로 뉴스로 편성되었는지 귀에 익은 여성 아나운서가 딱딱한 어투로 선동하는 선전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수력발전에 의존하는 전기 사정이 얼마나 열악한지 엘리베이터도 일행이 움직이는 시간 외는 가능하면 꺼두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일행을 보좌했던 안내원은 북한 해외동포영접국 2처 김희찬 씨였는데 마른 몸매에 상당히 고집 있게 생긴 사람이었다.
첫날, 우리 일행은 평양 봉제공장을 방문했다. 1976년 창립한 조선은하무역총회사는 피복 가공무역을 전문으로 했다. 공장이 넓고 시설도 좋았다. 이 회사는 주로 양복 슈트, 재킷, 셔츠 종류 등을 생산해서 수출하는데 품질도 좋아 보였다. 하지만 여러 대의 가동 라인 중에 한 라인만 가동되고 있었다.
문제는 생산을 해도 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즉 수출이 부진해서 공장 가동률을 올릴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공장장인 듯한 여성 간부가 나와서 회사 설명을 하기에 내가 물었다.
“수출은 주로 어 디로 합니까?”
“주로 일본에 수출 합니다.”
조총련계 재일 동포들이 주 바이어였다. 예전에 조총련계에서 공장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일본 경제가 거품으로 무너지면서부터 수출 판로가 막막해진 상황이었다. 시장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모르는 것 같아 답답했다.
나는 간부에게 말했다.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구매자이고, 수출에는 바이어가 있어야 하는데 미국이 세계 최고의 바이어입니다. 문제는 국교가 수교되어 정상화되어야만 수출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제품도 좋고 동포로서 가능하면 같은 민족의 제품을 구매하고 싶지만 정치적인 매듭이 풀려야만 계약도 가능합니다. 보따리 장사를 한다 해도 수입할 때 원산지 증명이 되어야 하는데 법적으로 수입이 불가능하니 이 문제를 먼저 푸는 게 우선순위가 아니겠소?”
정곡을 찌르는 나의 질문에 여성 간부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내원들도 다들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우리 일행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서둘러 봉제공장을 나왔다.
저녁에는 고급 식당이라고 하는 〈평양단고기료리점〉으로 갔다. 각 부위별로 깔끔하게 나왔고 맛도 괜찮았다. 가격이 35달러라서 비싼 편이었다.
다음날은 판문점에 들렀다. 남북 군사분계선을 앞두고 선 양측 경비병을 보니 서울이 지척인데 중국을 돌아 평양으로 와야 하는 현실이 더욱 실감이 났다. 통일은 결코 말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북한 당국이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를 시작한다면 통일도 결코 먼 나라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