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3월, 봄빛이 화사하게 쏟아지는 여의도공항 가도에는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공항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이 환송을 나왔다. 고대하던 유학길이지만 막상 한국을 떠나게 되니 착잡했다.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아버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시고는 당부하셨다.
“인생에는 기회가 세 번 온다. 한두 번 놓치더라도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어머님은 멀리 떠나는 아들이 눈에 밟히시는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그런 어머님의 모습에 괜히 콧등이 시큰해졌다.
출국장에서 가족들이 나를 떠나보내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내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할머님은 오랜 세월 손때 묻은 작은 성경책을 건네주시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태평양 건너 이국으로 떠나는 손자를 보내 여의도 공항에 환송 나온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과 친척들은 할머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선물이었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뵙기 힘든 분이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나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버 렸다. 애써 눈물을 삼키며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
세계 빈국 중의 하나인 한국의 청년으로 비행기는 일생에 단 한 번 타볼까 말까 한 것이었다. 당시 노스웨스트 항공, 캐세이퍼시픽 항공 등의 외국 항공사들과 비교하면 국영 대한항공사가 보유했던 비행기는 낡은 프로펠러기뿐이었다. 정비기술 및 제반 시설 또한 매우 열악했다.
나는 공항에서부터 탑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처음이라 신기하고, 긴장도 되었다. 과연 이 거대한 철제 덩어리가 하늘을 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미국행 노스웨스트 4발 프로펠러 비행기는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논두렁이 구불구불 기어가는 촌락 사이로 한강은 말없이 흘렀다. 야트막한 야산과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보이는 가난한 내 땅, 하지만 정든 고국,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는 심정이 무거웠다. 그러나 이내 밝은 얼굴로 창가에 기대어 멀어지는 내 나라를 보며 다짐했다.
내 나이 스물다섯, 희망을 가슴에 채워본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노신(魯迅)은 내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고향」에서 노신은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희망의 길에 섰다. 광복 이후 청년들에게 해외유학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꿈이었을까? 나의 미국행은 시대를 앞서가는 아버님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유교적 체면문화로 인한 좁은 학벌주의를 경계하셨다. 외형적인 학벌보다는 실력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계셨다.
‘아버님께서 만들어 놓은 길을 나는 조금은 쉽게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달려가는 미국으로의 이 길이 훗날 내 뒤를 따를 누군가에게 작지만 보람찬 희망이 되리라. 그 누구도 결코 유아독존이 될 수 없다. 누군가가 앞서 걸어간 길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할머님께서 새벽 제단을 쌓으시면서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만드는 길에 책임을 가져야 했다. 내 뒤를 따라올 누군가를 생각한다면…… 희망, 그것은 길이 되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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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공항에 환송나온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과 친척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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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괌에 기착했다. 활주로 넘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닷가에 종려나무들이 늘어선 풍경은 영화에서나 본 것처럼 신기했다. 급유를 마친 비행기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날았다. 은행에서 환전한 미화 350불은 어머니가 팬티 속에 작은 호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넣어 꿰매주셨다. 그러니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서 국내선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척 이나 목이 말랐다.
공항 대기실에 구내매점이 있었는데, 병아리 빛의 파인애플 주스, 분홍빛을 띤 구아바 주스, 노란 오렌지 주스가 플라스틱 통에서 샘물처럼 시원하게 솟아나고 있었다. 한참이나 보면서 군침이 돌았지만 나는 주머니만 만지작거렸다. 내의 안쪽 주머니를 뜯어서 돈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참기로 했다.
공항에서 국내선 TWA(Trans World Airlines)를 갈아타고 캔사스시티로 왔다.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틀은 꼬박 비행기를 탄 것 같았다. 날짜 경계선을 넘어오면서 시간은 정지되어 버렸고, 피로감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공항에는 친구 임창빈 군이 마중 나왔다. 중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던 친구의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이국에서 만나는 단짝이라 반가움은 형언할 수 없었다. 그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다운타운을 들어서자 잘 정비된 도로와 말끔한 빌딩들, 멋진 차들, 마치 영화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한참 넋에 빠져서 바깥을 두리번거리자 친구는 말했다.
“열흘만 보면 지겨워질 거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一紅) 이란 말이 있잖아?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 해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고.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다를 것 없지. 여기도 살다 보면 별거 아니야. 아무리 가난해도 내 조국만 한 게 있겠냐? 너도 이제 시작해봐라. 고생길이 훤하다.”
친구는 1957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듬해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래서 인지 마치 군대 에서 제대를 앞둔 선임병이 신병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군대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시작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다. 문제는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 역시 ‘꽃은 진다’ 는 사실을 알지만, 꽃이 지는 절망보다는 꽃이 피는 것에 대한 희망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반잔의 물이 담긴 컵을 보고도 어떤 이는 '반밖에 없네”라고 하지만 어떤 이는 ‘1잔이나 남았네”라는 반응을 보인다. 나는 후자이다. 그것은 내가 힘들었던 상황들 속에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험한 삶의 철학에 있다.
차는 유럽식 건물로 단장된 컨트리클럽 플라자(Country Club Plaza)를 지나고 있었다. ‘관광 가이드’ 를 자처한 친구의 얘기로는 서울의 명동에 해당된다며 Jesse Clyde Nichols 씨의 열정과 비전으로 1922년 도심 건물이 스페인 풍으로 설계되어서 건축된 곳이라고 말했다.
1925년에 시작된 플라자 점등식은 매년 추수감사절을 기해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름다운 야경을 연출하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고 친구가 귀띔해주었다. 스페인의 명물인 히랄다탑(The Giralda Tower)와 세빌 라이트(The Seville Light)를 볼 수 있는 이곳의 유럽식 분위기는 어린 시절을 상해에서 보낸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어서 인지 나는 이 플라자에 매료되었다.
해마다 점등으로 환상적인 연말 야경을 보여주는 컨트리클럽 플라자의 12월이 기다려졌고,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며 그날만큼은 공부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