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의 시대 (12회)
  제2장 해방 이후의 한국

나는 눈을 감고 음악 감상실 돌체다방에 앉아 있었다. 코끝을 감도는 희미한 커피 향에 섞여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여동생 덕분에 오페라의 아리아를 매일 들었는데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나 역시 뜻은 몰라도 유명한 아리아의 몇 소절 정도는 따라 부르곤 했다.

좋아했던 곡은 푸치니의 『토스카』 중에서 제3막의 아리아인 「별은 빛나건만」인데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노래다. 성 안젤로 성에서 카바라도시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토스카에게 작별의 편지를 쓴다. 사라져가는 새벽별을 바라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고는 토스카와의 사랑을 되새기며 고별의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이다.

돌체의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청년이 부르는 애절한 아리아가 귀를 파고들었다.

별은 빛나고, 대지는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채소밭의 문이 삐걱거리며
모래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그녀가 들어와
내 품속에 몸을 맡겼다.
오! 달콤한 입맞춤, 수없는 나른한 애무
나는 떨면서 베일을 벗기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틈도 아쉬워하며
이 사랑의 꿈은 영원히 사라졌네.
모든 것이 떠나갔네.
절망 속에 나는 죽어가네!
절망 속에 나는 죽어가네 !
이제 와서 이토록 아쉬운 것일까, 목숨이란!
목숨이란!

오페라의 가사처럼 나 자신이 마치 사형집행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힌 느낌이었다. 유학은 고교시절부터 간절한 꿈이자 내 젊음의 해방구였다. 출구가 막혀 버렸으니 꼼짝달싹 못하게 갇힌 몸으로 전락한 신세여서 친구들과 어울려 거의 매일 명동으로 나갔다.

음악은 중반을 흘렀다.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대목이었다.

“svani per sempre il sogno mio d'amore"
(즈바니 빼르 쁘레 일 쏜뇨 미오 다모레. 이 사랑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네.)

▲ 돌체다방을 끼고 있던 1960년대 초의 명동공원 [사진출처 : 서울스토리(서울역사박물관)]
 
I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 의거가 일어났다. 해방 후의 상해 시절로 회귀한 느낌이었다. 답답한 정치현실은 당시 혼란하던 중국과 비슷했다. 한국은 자유를 누릴 줄만 알았지 자율과 법치를 지켜야 하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가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한 시대를 마감한 한국의 정치는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정권의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내각제인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수습하지 못한 민심은 이미 현실 정치에서 돌아서고 있었다. 낙후된 경제와 혼란한 정치 현실에서 사람들은 구심점과 방향을 잃었고, 희망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20대 청년에게 한국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했다. 제대한 나는 유학 떠날 준비를 했다. 그것이 당시 유일한 희망의 출구로 보였기 때문이다. 반도호텔에 있는 샤프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 표를 사고 유학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출국금지령이 발동되어버렸다. 미국에 가려고 오랜 세월 유학 준비를 했던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한동안 방황했다. 마치 새장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시국은 뒤숭숭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 부정적이었다. 자유당 정권에서 민주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민심이 정치를 떠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먹고사는 경제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그것은 한국전 이후 북한에서 내 려온 어 머니들 흔히 ‘또순이’부대로 인한 것이다. 전쟁 통에도 절망하지 않고 군복 염색부터 꿀꿀이죽에 이르기까지 시장 바닥에서부터 한국경제를 다시 일으켜온 북한 피난민들의 생활력이 조선조부터 사대부 시상에 젖어있는 한국인의 의식을 바꿔놓았다.

전쟁은 사농공상의 전통적인 관념을 송두리째 뒤바꿔 버렸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잘 살아야 한다는 의식으로 변모되는 시대상은 이후 「잘살아 보세」라는 건전가요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군사혁명 이후 사람들은 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왕정시대를 기대하둣 혁명정부에 기대를 품었다. 아버님은 한국 경제 발전에 대한 측면에서는 박정희의 노선을 지지하셨다. 그러나 유학길이 막힌 젊은 혈기의 나에게는 상실의 시대였다.

아리아는 마지막까지 왔다.

E m uoio disperato!
(에 무오 이오 디스빼라또! 절망 속에 나는 죽어가네 !)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동의 음악 감상실을 나서면 송도 빈대 떡집 에서 자주 모였다. 시인이나 소설가, 예술인들이 많이 모이던 유명한 장소였다. 젊은이들의 양지와도 같았던 음악감상실 세시봉도 자주 찾아갔던 장소였다. 차도 마시고 음악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해거름 무렵이면 땅거미 지는 명동 뒷골목에서 막걸리를 한잔하며 울분을 삭혀야 했다.

“tanto la vita!
(딴또 라 비따! 목숨이란!)”

아리아의 마지막 소절이 귓가를 스쳤다. 우리는 일어서서 음악감상실을 빠져 나왔다. 뒷골목의 술집을 순례할 차례였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걷노라니, 맞은편에서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체격 좋은 신사가 걸어오며 스쳐 가려던 순간, 그는 나를 불러세웠다.

“김 병장 맞지?”

나는 정장 차림의 사내가 낯설었다. 가만치 뚫어지게 보니 뜻밖에도 홍성기 중대장이었다. 전투복 차림의 검게 탄 얼굴에 바투 자른 머리만 기억했기 때문에 정장에 머리를 길러 포마드를 바른 그의 모습은 전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홍 대위는 그간 군사혁명정부에 가담해 있었다. 아무리 HID 출신이라도 항상 무장하고 사는 숨 막히는 전선의 긴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혁명 성공 후에 제대하고 지금은 중앙정보부에서 일하고 있다."
“저는 유학 준비가 다 되어서 출국할 날짜를 잡았는데 출국 금지가 되었습니다.”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겠다."

그는 전화번호를 나에게 주었다. 홍 대위의 도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얼마 후 그에게서 희망적인 연락이 왔다.

“곧 유학생들에게는 출국조치가 내려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이후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외 출국제한을 완화한다고 발표하며 학생들에게 해외 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홍성기 중대장은 두 번이나 철창에 갇힌 나를 구해주었다. 헌병대의 영창에 감금되기 직전과 상실감으로 감금당한 청춘기의 절망을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나는 중대장과의 재회를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좁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다시금 깨달았다. 그 누구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해서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인생에서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자신과 분명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진실 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이었다.

훗날 내가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인간관계였다. 그것은 인간경영이라는 나름대로의 경영철학을 지탱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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