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생활 (11회)
  제2장 해방 이후의 한국

“공비다!” 방에서 튀어나오는 사람은 군복차림의 장교였다. 다행히 비무장인지 총을 쏘지는 않았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 시절, 중대 막사 지붕이 다 헐어가고 있어 짚을 구해 고치려고 농가로 짚서리를 나갔다. 운전병과 후임 병사 몇 명을 데리고 트럭을 타고 험한 산길을 누비다가 어느 민가 마당에 놓인 짚을 발견하고는 몰래 옮겨 싣는 순간, 주인이 튀어나오면서 질러대는 고함이었다.

그 순간 공비로 오인되자 혼비백산해 일제히 트럭에 번개처럼 올라탔다. 운전병은 속력을 올려 트럭을 몰았지만 즉각 스리쿼터(적재량 3/4톤짜리 군용 트럭) 한 대가 맹렬히 추격해왔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과속으로 달리다 보니 트럭이 머리부터 벼랑 아래로 내리 박혔다. 그 순간 나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무스탕의 은빛 날개에서 쏟아지던 숱한 총탄이 일본군의 등 뒤로 난사되던 모습, 라엄광 부관이 자살하던 순간의 총성이 귓속으로 아련히 들리는 듯했다. 낭자하게 피가 뿌려지던 그 여름 전쟁의 기억과 나뒹구는 주검이 내 모습으로 점점 구체화 되었다.

‘죽는다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현실로 다가온 것일까? 그토록 두렵다는 죽음이 이렇게 찾아오는 것일까?’

꼼짝할 수 없이 쓰러진 나는 죽음 앞에서 의연해졌다.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내 삶의 숙명이면서 내 신앙이기도 했다. 아마 엄마와 함께 북경에서 오던 그 열차에서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총을 맞고 울음을 터트리며 죽어가던 그 날의 아이가 사실은 내 모습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귀국선에서 푸른 파도에 떠내려가던 아이가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보인 연민과 동정이 사실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공비(?)를 추적해온 차량 몇 대에서 뛰어내린 병력이 포위하더니 플래시를 켜든 포병 헌병 대원들이 지프에 내렸다. 의무병이 생사여부를 확인하고는 응급조치를 했다. 우리는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고, 현병대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다. 짚을 훔친 집은 포병부대장의 사택이었다. 제대를 앞둔 나에게 닥친 큰 위기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 가리라 마음먹고 1958년 홍익대에 들어가고부터 유학시험을 준비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졌지만 끝내는 합격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입대 첫 식단으로 갈칫국이 나왔는데 꼬리와 머리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넣어 끓인 것이었다. 비린내가 역하게 훅 코를 찔렀다. 식탁에 앉은 동기들 표정 역시 나와 같았다.

하지만 군대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긴장했는지 무척 배가 고팠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사회에서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짬밥’이 고소하고 달기까지 해서 밥 한 톨 안 남기고 국물까지 깨끗이 마셔버렸다. 나는 어떤 환경에서도 잘 적응했고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상해 길에서 직면한 죽음, 귀국선의 뱃멀미, 전쟁에서의 생존과 피난 둥 갖가지 역경들을 통해 나는 꽤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면역되어 있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역경에서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죽음에 직면해본 사람이면, 비참한 주검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웬만한 비극은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신병훈련 마지막 단계인 퇴소식을 마치고는 논산을 떠났다. 우리를 태운 기차는 용산을 거쳐 101보충대로 직행했다. 버스에서 내려 자대 배치를 기다리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내가 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운명이 나를 택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힘들고 불안한 순간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는 선택하는 것과 선택 받는 두 가지 경우가 생긴다. 어느 쪽이든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운명 앞에서 낙천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경우이든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더블백 (Duffel bag)을 멘,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인 나는 최전방 28사단으로 차출되고 18연대 수색중대로 배치되었다.
 
▲ 군대 시절

자대 배치는 엄격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인사 청탁으로 인한 군 입대 면제 혹은 보직변경 등의 비리가 불거졌다. 때문에 육군본부의 지시로 일체의 인사 청탁을 막기 위해 논산훈련소 신병 전원을 한 명도 열외 없이 보충대로 인솔했다는 것이다. 본래 관례적으로는 용산역에서 보직이 변경되는 일이 더러 있었는데 우리 기수부터는 일체의 비리가 근절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간사한지라 괜히 아버님께서 힘을 써주었으면 후방으로 보직을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칙에 있어서는 티끌만큼도 타협이 없는 아버님의 성격을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누누이 강조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젊어서 고생이야말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교육이다.’ 고생이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깜빡거렸다.

신병을 태운 트럭은 어디인지 위치도 가늠하기 어려운 어두운 산속 비포장 군사도로를 털털거리며 달렸다. 불빛 한 점 없는 깜깜한 길을 트럭에 실려 가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군 생활이 이 밤처럼 까맣게 여겨지는구나.’

국방의 의무가 애국임은 분명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아무래도 군대라는 특수단체와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반공에 대한 생각이나 애국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연천에 있는 28사단에 배치되었을 때 부대 분위기가 뜻밖에도 예상보다 좋았다. 하지만 선임한테서 들었던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육군 28사단장 서정철 준장이 예하 부대 순시 도중 부대교육검열 준비 상태가 미비하자 화가 나서 1대대장인 정구헌 중령을 지휘봉으로 구타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정 중령이 쏜 총에 사단장이 현장에서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군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우발적 하극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지만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통솔방식의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다.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 때문에 군대가 ‘소원수리’라는 명목으로 사병들의 불편사항을 파악하기도 하고, 선임병들이 신임 병사들을 구타하는 병폐가 다소 사라졌으니 졸병인 나로서는 다행스러웠다.

생각보다는 내무반 분위기도 좋았다. 나는 흔히 '따까리’라고 불리는 중대장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중대장 홍성기 대위는 HID 출신이다. HID는 전쟁 중이던 1952년부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한에 밀파되어 활동한 북파공작원을 양성하는 정보부대였다.

홍 대위는 HID 출신답게 생김새가 우락부락한 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말수도 적은 터라 대부분 부대원들이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 모시는 사병의 시각은 달랐다. 중대장은 무섭게 보이고 말수도 적었지만 무시무시한 부대 출신답지 않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다만 육체적으로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당직 때에는 실탄을 장전한 총을 잡고 의자에서 잤다. 한때 북한군에서 침투조를 남파시켜 간부급을 대상으로 머리를 질라·가는 잔인한 도발이 계속되어 온지라, 부대는 경비를 강화했고, 초소 역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부대 내 에서 지휘관이 실탄을 장전하고 당직 근무를 하는 정도의 숨 막히는 긴장이 계속되어 군 생활에서 심신이 고달팠다. 제대도 얼마 남지 않은 정월 설날인데 중대본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총각이라 영내에서 생활하는 중대장은 군대 파키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고 부대원들은 쥐 죽은 듯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를 눈치를 챈 선임하사가 모수자천(毛遂自薦) 격으로 일어나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명절이라서 집에 떡국을 해놓았으니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선임하사를 따라 한탄강을 건너 떡국과 막걸리 한 양동이를 들고 와 심신의 피로가 누적된 부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포병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는데 중대장이 찾아왔다. 검게 탄 우락부락한 홍 대위의 얼굴이 그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신원이 중대장에게서 확인된 후에야 풀려나 자대로 돌아왔다. 제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가라고 했는데 십년감수한 느낌이어서 어서 제대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광주로 발령이 나 두 달가량을 대기하게 되자 국방부 시계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2개월이 20년이 더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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