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물을 몇 모금 마셨지만 팔다리를 부지런히 놀린 덕에 제법 수영 실력이 나왔다. 벌써 저 멀리 깊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원목으로 헤엄쳐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무엇이든지 겁없이 덤비는 성격인 나는 수영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바다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오후 체육 시간에 선생님은 수영을 가르쳐 준다면서 학생들을 보트에 태우고는 원목이 둥둥 떠다니는 송도 근처 바다로 나갔다. 그는 한참을 바다로 노를 저어 깊은 곳에 오자 순식간에 학생들을 바다로 던져 넣었다. 일부 학우는 신나게 바다로 뛰어들었고, 일부는 마지못해 홰치는 닭처럼 버둥거리며 빠졌다. 스파르타식 수영교육이라 아주 위험한 방식이었다.
수영을 전혀 못 하는 아이들도 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원목이 떠 있는 곳까지 죽으라고 헤엄쳐 갔다. 이 한 번의 강습으로 아이들 전부가 더 이상 물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다들 수영을 잘하게 되었다. 수영은 평생토록 내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수영장에서 취미 삼아 배운 것이 아니라 파도치는 바다에서 목숨을 담보로 배웠기 때문이다.
한창 무덥던 여름 7월 13일, 토성 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피난 천막 학교인 용산중학교에 입학했다. 후암동에 있던 용산중학교는 일본인 교육기관을 서울시가 인수해, 1945년 9월 9일에 6년제 중학교로 개교했다. 전쟁으로 휴교한 후 부산으로 피난 온 용산중은 1951년 3월 7일 송도 해변에서 학교를 열었다.
송도 해수욕장 모래벌판에 쳐 놓은 군용천막이 교실이었다. 남으로 바다를 끼고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해수욕장인 송도는 뒤에 업은 금치산(金時山)에 올라가 목을 쭉 빼고 바라보면 희미한 안개 사이로 가물가물 대마도가 보였다.
아직 어린 중학교 1학년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가까운 송도에 바다낚시를 자주 가곤 했다. 낚싯대는 만들어서 사용했다.
작살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굵은 철사 한 토막을 전차 선로 위에 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침을 뱉어 고정하고 멀찍이 피해 숨어서 기다린다. 전차가 지나간 뒤에 달려가 영락없이 납작해진 철사 토막 끝을 날카롭게 갈아 촉으로 다듬었다. 대나무를 꺾어다가 철사 촉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무줄로 칭칭 감아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깡통으로 만든 물안경을 쓴 채 바닷 속으로 들어가서 물고기를 찔러 잡았다. 그렇게 힘들게 잡은 생선을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구워 먹었다· 먹을 것이 귀한 피난시절이라 그 맛이 일품이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깡통 물안경을 쓰고 잠수해 고기를 잡은 것 역시 수영에서 얻은 자신감의 발로였다.
무작정 학생들을 바다에 처넣은 체육선생의 교육은 전혀 체계적이지 않고 마치 군대처럼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방식이었지만 단시간에 학습효과가 있었다. 나는 물론 학우들은 그런 방식으로 금세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때 수영을 배웠던 방식은 어른이 된 후 세상에 과감히 나 자신을 던질 수 있게 해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군대식의 강제 주입식 교육이 좋은 교육법은 아니겠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기르는 데는 그만큼 결사적이어야 했다.
죽을 각오로 임한다면 세상에 못 이룰 일이 없다는 생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라는 말을 남겼다.
전선 12척으로 왜선 133척과 맞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장수들을 소집한 충무공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투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라고 결사 항전을 강조했다. 전쟁에 임할 때 살고 싶어 움츠리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자는 전쟁에 패배할 것이고, 죽을 각오를 다 해 싸우는 자는 승리할 것이라는 그 말을 실제 전쟁의 소용돌이 에서 체험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내 인생에서 찾아온 숱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큰 동력이 되었다.
1951년 3월 16일 서울이 재수복된 이후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1953년, 송도 피난 학교에서 중학교 3학년 때 1학기를 마치고 서울 용산구 후암동 학교로 돌아왔다.
이듬해 용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전쟁 기간에 미8군 제3 철도수송단이 자리 잡았던 용산고 자리는 고등학교가 1953년 9월 18일 서울로 돌아와 1954년 7월 1 일 미군으로부터 본관을 인수했다. 서울의 명문 ‘5대 공립고’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인 1917년 4월 설립된 5년제 용산 공립중학교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용산중에는 서울고의 전신인 경성중학교처럼 일본인 학생들이 주로 다녔고 한국인 학생들은 극소수였다. 인근 후암동이 일본인들이 자리 잡은 주요 거류지였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일인들이 떠난 후 1946년 9월 9일, 과거와 단절한 6년제 공립 용산중학교로 새롭게 출발했다가 1951년 8월 31일 교육법 개정에 따라 용산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용산고는 전쟁 때 학생 1백여 명이 제18포대에 지원하여 11월 26일 평남 덕천에서 중공군 개입으로 50여 명이 전사하여 순국 학도탑이 건립되었다. 학교생활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영국계 미션스쿨을 다녔고 무역업을 하는 아버님의 영향으로 인해 일찍 세상에 눈을 떴던 나는 학교에서 문법만 가르치는 영어를 배워봤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수업도 주입식으로 무조건 외우는 방식이라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지만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한 편이었다.
내가 학교생활에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분야는 바로 또래 친구들과의 교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직접 체험하면서 교과서를 외우는 일 따위에는 이미 관심이 없었다.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헤쳐 나오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과 아이들의 울부짖음을 겪었던 탓이다. 그로 인해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적이 많았다.
아직은 어렸기에 남을 돕는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클럽이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로터리클럽(Rotary Club)이나 라이온스(Lions Clubs) 같은 클럽을 조직해서 봉사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마침내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돕고 봉사하며, 어떤 일이든지 정의를 위하여 단결하여 정의를 지키자’는 취지로 HHU(Help, Honor, Unification)클럽을 결성했다.
창립 회원은 12명이었다. 학교에서 흔히 공부 최고, 싸움 최고, 연예 최고, 돈 최고, 요즘 식이라면 “짱” 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어쨌든 이런 식의 기준을 세워 3명씩 추려 클럽을 조직했다. 우리가 결성하자 학교 내 최고의 클럽이 되었다. 가입하고 싶어 하는 동기들이 많았지만, 회원 수를 더 늘리지는 않았다.
용산고 8회를 첫 기수로 유지하면서 후배 기수 9회 역시 12명으로 뽑게 되었다. 그것은 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학교 전통으로 유지되어 지금까지 칠백 여 명의 HHU 회원을 배출했고 후배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또한 전체 총회도 가지면서 우의를 다지고 있다. 졸업반이 되자 앞날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클럽 회원들에게 제안했다.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기껏해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 굶주려 죽는 사람들을 다 도와줄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넓은 세상에 가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 실천을 위해 영어회화를 공부하기로 했다. 우연히 알게 된 미군 사병인 스콧(Scott)을 집으로 초대해 회원들과 함께 그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래서 인지 당시 회원 중에 8명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