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죽음 (8회)
  제2장 해방 이후의 한국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흉흉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까지 내려왔다”
“한강이 폭파되어서 피난을 갈 수 없다”

전쟁의 소문을 듣고 피난을 떠나는 이웃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서울은 안전하다는 방송만 믿고 피난을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서울시민들 대부분이 정부의 말만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우리 집의 바로 아래 주택은 아주 가까이 내려다 보였다. 마당이 손안에 잡힐 둣 한눈에 들어왔으며 고관이 머무는 별채도 보였다. 그 집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장군의 사택이었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채 참모총장은 엄청난 몸집 에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 아버님 은 평양고보 몇 년 후배 채 총장과는 친분이 있었다. 어머님도 그의 부인 백경화 씨와 평양의 학맥 이 닿는지 가까운 사이였다.

「전우여 잘 자라」라는 곡의 노랫말 중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라는 대목을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6·25가 터지자 채 총장은 전투지 휘를 하느라 집 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난 6월 28일, 부관이던 대위(내게는 대위로 보였다)가 부하 사병 다섯 명과 마지막까지 참모총장 사택을 지키다가 군용 지프에 트레일러를 달고 한강 쪽으로 갔다. 그러나 벌써 한강이 폭파가 된 시점이어서 도하가 불가능한 탓에 이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 들러 할아버님에게 부탁을 했다.

“민간인 옷 다섯 벌을 주십시오.”

그래서 집에 있는 아버지의 옷 다섯 벌을 내주었다. 앞집이라 우리 집 앞마당에서 보면 사택의 정원과 대문이 환히 보였다. 나는 그들이 옷을 빌려 간 이유가 궁금해져 그 집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부관은 사병들에게 우리 집에서 빌린 민간인 복장을 갈아입혔다. 자신은 사택 안으로 들어가 군복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나왔다.

단정한 차림에 대위 계급장을 단 부관은 부하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는 남산 쪽으로 피신을 시켰다. 부하들이 대문을 나서자 그는 권총을 뽑아 정원을 지키던 군견 셰퍼드 두 마리를 쏘아 죽였다.

“탕! 탕!” 총소리에 우리 집 창문이 흔들렸다. 할아버님과 나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부관은 천천히 관자놀이 부근에 권총을 갖다 댔다. 할아버님은 나를 와락 안으시고는 그 광경을 몸으로 막으셨다.

“탕!”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내 심장이 뒤흔들렸다. 초여름 날씨에 온몸의 혈관이 싸늘히 식어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부관은 피바다 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평생 그런 장렬한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의 죽음이었다. 바로 그때 민간인 복장을 한 빨치산 인민군 선발대가 나타났고, 뒤이어 따발총을 든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할아버님은 잽싸게 나를 안고 난간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난간 틈 사이로 계속 그 집 광경을 지켜보았다. 인민군 지휘자가 마침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동무, 죽은 개를 줄 테니까, 이 사람 아무 데나 갖다 묻으라우!”

겁먹은 남자는 부관의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부관의 죽음은 내 뇌리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소중했다면 살길을 찾아 여섯벌의 옷을 빌렸을 테고 부하들을 데리고 남산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관은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을 택했다.

직책상 중요한 대외비를 알고 있는 참모총장의 부관이 죽음을 택함으로써 보여준 애국충정은 나 개인의 목격담을 통해 역사에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장렬한 죽음을 직접 목격한 나는 그의 충정을 믿는다. 시체마저 찾지 못한 한 국군 장교의 한 맺힌 죽음에 하늘을 우러러 명복을 비는 바이다. 내가 쓴 몇 줄의 글로 누명이 벗겨질리 만무하지만, 억울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영혼이 하늘에서 눈물을 닦고 웃을 수 있으리라. 꽃잎처럼 떨어져 간 장교가 해원(解東)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한국에서 방문한 이재철 목사(한국백주년기념교회)께서 나의 전쟁 목격담을 듣고서 귀국하신 후에 2010년 현충일을 맞아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게 되어 비로소 전쟁의 비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 이재철 목사 부부 방문 (2010.)

충격의 6월 28일이 지나자 동네 담벼락에는 시뻘건 글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이웃에 사는 황성수 국회부의장의 집에서 일하던 식모가 여성동맹(여맹)위원장이 되었다. 간첩이던 그녀는 완장을 찬 인민위원들을 데리고 미리 점찍어 둔 집들을 수색하러 다녔다.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노력동원’ 을 시키거나 의용군으로 끌고 갔다. 이웃에 사는 형들이 어디론가 끌려가서는 종내 소식이 없었다. 더러는 군인들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다니며 우익 인사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다. 완장 찬 식모의 엉덩이 내젓는 걸음에 동네는 쑥대밭이 되었다.

우리 집에도 아버님을 검거하러 왔다. 할아버님이 미리 아버님을 피신시킨 후,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이 집에 국방군에 나간 동무는 없습네까?”
“보다시피 어린 아이 뿐이라오.”

할아버님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인민군들은 몇 가지를 더 묻고는 되돌아갔다. 이북이 고향인 할아버님을 인민군들이 협박하진 않았지만 매일 밤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마 아버님이 있다는 사실을 식모에게 듣고 불시에 들이치려는 것이다.

용산구 갈월동은 일본 적산가옥이 많은 부르주아 동네여서 총 든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치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할아버님은 매일 밤 숫돌에 큰 칼을 시퍼렇게 갈아 대문 위에 걸어 두셨다. 인민군들이 총을 겨누는 상황이 오면 먼저 칼로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할아버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는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셨다. 오히려 인민군들이 할아버님의 기세에 눌려 집안을 대충 뒤지다가 나가 버리곤 했다.

할아버님께서 만든 가족의 은신처는 거실 옆의 일본식 다다미방에 있었다. 구석 다다미 한쪽을 들어내면 바닥에 충분히 누울 공간이 있었다. 할아버님은 밤이 되면 가족들에게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숨어 지내게 했다. 그 다다미 위로 뒤주와 책상을 옮겨 두었기 때문에 인민군들은 뒤져보다 매번 허탕만 치고 가버렸다.

공산당은 우리 앞집인 채병덕 장군 집을 내무서 본부로 삼았다. 공산당과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그 집에 있거나 드나들었다. 내무서 본부를 중심으로 가까이에서 감시당한 30, 40대 장년충은 마음대로 운신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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