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그 자체가 곧 이벤트다. 특히 무대예술의 경우 관객을 동원시키려면 화제를 불러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기획단계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이벤트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어떤 이벤트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공연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의 질이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겠지만. 홍보 효과 또한 그만큼 중요한 게 무대예술의 특징이다.
1999년 내가 처음 세종문화회관 총감독으로 와서 가장 고심한 점은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종 이벤트를 펼치고, 대중성이 강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세미 클래식’과 같은 공연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 중의 하나가 제야음악회와 정동진 해맞이 행사를 하나의 연계된 이벤트로 엮는 아이디어였다. 정동진은 1995년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장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관광지로 떠오른 명소다. 특히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로 유명한 곳인데, 나는 1996년부터 예술의 전당에서 연례행사로 시작한 제야음악회를 1999년 세종문화회관에서도 열기로 하면서 거기에다 ‘정동진 해맞이 행사’를 연결시켜보자는 구상을 하였던 것이다.
즉, 세종문화회관에서 제야음악회를 보고 나서 곧바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동해의 전동진으로 가서 새벽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구결하자는 이벤트였다.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기쁨을 함께 엮는 행사였던 것이다.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 있을 때 나는 ‘제야 음악회’를 개획한 적이 있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 보신각종이 울리는 종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나는 바로 그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제야를 맞을 수 있는 행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나는 1996년부터 예술의 전당에서 ‘제야음악회’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LG패션(신홍순 사장)과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이영혜 사장)>의 도움을 받아 행사를 시작했다. LG패션에서는 5천만 원의 행사비를 지원했고,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는 홍보를 주관했다.
나는 당시 수원시향 상임지휘자였던 금난새 씨를 제야음악회 지휘자로 초청하였는데, 첫 회부터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 10시경부터 공연이 시작되어 제야의 종이 울리는 자정에는 무대 위의 출연진과 객석의 관객들이 손에 손을 잡고 ‘사랑으로’를 부르는 축제의 장을 연출하였다.
예술의 전당 제야 음악회가 성공을 거두자, 그 다음 해인 1997년에는 수원에서도 자체적으로 제야음악회 기획을 세웠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이미 예술의 전당에서 1997년 제야음악회 지휘자로 금난새 씨를 내정해놓고 계약까지 마친 상태인데, 수원시가 뒤늦게 제야음악회를 기획하면서 수원 시향 상임지휘자인 금난새 씨를 자신들의 행사에 참여시키게 되어 예술의 전당 행사에는 빠질 수밖에 없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미 금난새 씨가 제야음악회 지휘를 맡는다고 홍보물이 나간 상태인데, 수원시향 자체 행사 때문에 불참의사를 밝혀왔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뭐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이제 와서 지휘자를 바꿀 수는 없지!”
제야 음악회 공연 책임자의 보고를 받은 나는 곧바로 수원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금난새 씨와 상의해서 될 일이 아님을 간파하고 직접 결정권자인 수원시장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금난새 씨를 예술의 전당 제야 음악회에 참석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당시 심재덕 수원 시장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금난새 씨는 수원시향 상임지위하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원 제야음악회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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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문화회관 총감독 취임 후 첫 사업으로 사무실을 뒤로 옮기고 그 자리에 시민을 위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 사무실 이전 행사 후 참석인사들과 기념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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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금난새 씨는 작년부터 우리 예술의 전당 제야음악회 지휘를 하였고, 올해도 이미 계약이 끝난 상태입니다. 뒤늦게 수원시에서 제야음악회를 개획해놓고 무슨 소리입니까? 우선 순위로 따져볼 때 금난새 씨는 당연히 우리 예술의 전당 제야음악회 지휘를 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수원시향 상임지휘자인데, 당연히 우리 수원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우선순위지요.”
수원시장은 아주 강압적으로 나왔다.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수원 시장과 전화로 설왕설래를 거듭하였다. 큰 소리가 오갈 정도로 격론을 벌인 끝에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선에서 결론을 내렸다. 금난새 씨가 수원에서 예정보다 일찍 제야음악회를 끝내고 나서 조금 늦게라도 좋으니 예술의 전당 제야음악회에 참가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따라서 1997년 수원의 제야음악회는 초저녁에 열릴 수밖에 없었고, 금난새 씨는 그 음악회를 끝내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밤 11시경부터 예술의 전당 제야음악회를 지휘하였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음악회지만, 이미 깊은 밤의 축제라 제야의 분위기를 더욱 낼 수 있어서 불만은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술의 전당에서 처음 시작한 제야음악회는 그 후 회를 거듭할수록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전국의 시향이 있는 지방도시에서도 해마다 제야음악회를 여는 전국적인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1999년 세종문화회관 총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도 자체적으로 제야음악회를 개최하기로 하되, 예술의 전당이나 전국 지방조시 그것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음악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야음악회와 동해 정동진 해맞이 행사를 연계하는 기획이었다.
“좋은 기획이긴 한데, 제야음악회가 끝나고 나서 열차를 타고 정동진까지 가려면 해 뜨는 시간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야음악회를 초저녁에 열수도 없는 일이구요.”
기획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나? 그러면 초저녁에 음악회를 한번 열고나서 그 팀을 정동진으로 보내고, 다시 제대로 된 제야음악회를 여는 거야. 2회 공연이 되는 셈이지. 기왕에 공연하는 것인데, 제야음악회 출연진으로 두 번 같은 공연을 하게 되면 일거양득이 아니겠어?”
내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199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야음악회는 1회의 정동진 해맞이 팀을 위한 공연과 2회의 순수한 제야축제를 위한 공연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나는 과연 제야음악회와 정동진 해맞이 행사를 연결하는 기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줄까 몰라 노심초사하였다. 그래서 내가 관여하고 있는 예장로터리클럽, 허행초, 낭만파클럽 회원들을 동원하여 행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런데 회원모집 결과 720명이나 되었다. 그 인원 모두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어서 저녁 8시부터 세종문화회관 제야음악회 1회 공연을 보고 곧바로 서울역으로 가서 전세 기차 10량에 각각 72명씩 나누어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다.
밤을 새워 동해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각종 이벤트가 연출되었다. 각 객차마다 간이 밴드가 돌면서 음악을 들려주고, 레크리에이션 등 즐거운 오락프로그램도 진행하였다. 또한 한국 기차역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855미터에 있는 추전역에서는 기차에서 잠시 내려 자정을 기하여 캠프파이어를 벌이며 새해를 맞는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정동진에서 첫 일출을 본 뒤에는 해안 절벽 위에 유람선 모양으로 세워진 썬크루즈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낮에는 모래시계 공원에서 신년맞이 공연을 보거나 조각공원 등 인근 관광지를 둘러보며 자유 시간을 즐기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것으로 제야음악회의 모든 일정을 끝마쳤다.
첫 행사 이후부터 나는 회원 모집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가는 해에 제야음악회 공연을 보고, 새해에 동해 정동진 해맞이 행사를 하는 기획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상적인 이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신문과 방송에서까지 현지 동행 취재를 하는 바람에 홍보가 아주 잘 되어 해마다 회원을 모집하면 1주일 이내에 매진이 되곤 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