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순리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쯜 때도 있는 것인데, 그래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이 생겼다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나쁜 일이 한번 발생하면 계속 그런 일만 생기는 악순환이 거듭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악순환이란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채 걷히기도 전에 나는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공직에서 떠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80년 5월에 문공부장관이 새로 임명되었을 때 그가 바로 이광표 장관이었다. 그는 당시 문공부 김은호 차관과 경기고등학교 동창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알력관계가 있었다. 이광표 장관은 관료주의적인 권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김은호 차관은 성격이 화끈한 의리파였다. 이처럼 성격이 다르다보니 두 사람은 업무상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당시 문공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공무원들만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종무관으로 종교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졸지에 인사발령이 떨어져 정책연구관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정책연구관은 이사관이나 부이사관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모두 7명이 발령을 받았다. 특별히 맡은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일종의 ‘대기발령’ 같은 성격의 자리였다. 공무원으로서는 마지막 가게 되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한참 일할 나이에 정책연구관으로 발령이 났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광표 장관에게 인사 불만을 따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광표 장관이 국회의 질의답변에 응하기 위해 국회에 갔다가 잠시 시간을 이용하여 나를 국회로 불렀다.
“정책연구관으로 보낸 걸 언짢게 생각하지 말게. 조금만 참으면 다시 인사발령을 내줄 테니까 그때까지 공연윤리위원회의 업무를 지도 감독하도록 하시오.”
그때 마침 유한열 국회의원이 나타났다. 그는 신민당 전 총재의 아들인데, 연세대학교 2년 후배였다.
“종덕이 형, 여기 왠 일이요?”
유한열 의원은 반갑게 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때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이광표 장관을 보고 그는 다시 한마디 하였다.
“이 장관 우리 후배이니 잘 좀 봐주시오!”
이광표 장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다시 문공부 장관이 교체되었다. 이광표 장관의 후임으로 이진희 장관이 임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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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은 사무관 시절로 나는 1980년 정책연구관으로 발령되어 사실상 문공부 공무원을 사직할뻔 했다 (월남 공연길에 오른 가수 고운봉 씨를 배웅하며 연예협회 이사들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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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공무원 생활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광표 장관이 현직으로 인사 발령을 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것이 실현되기도 전에 장관 교체가 되었으니 이미 그 약속은 물 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를 포함한 7명의 정책연구관들은 공직에서 물러나는 쪽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공직에서 떠나기 몇 개월 전부터 다른 정부 산하단체로 옮겨가기 위해 미리부터 각자들 자리 찾기에 분주하였다. 당시 나는 KBS 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가게 될 공산이 컸는데, 그 두 곳 중 자원하는 쪽으로 가게 해주겠다는 것이 고위층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문공부에서 예술인들과 일해 온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자리를 자원하였다.
다음 해인 1983년 3월에 정식으로 공직을 떠나는 것으로 결정이 되고 나서 1982년 12월 공직을 마감하는 망년 파티가 필동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는 이진희 문공부 장관을 위시하여 부이사관급 이상의 고급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는데, 해마다 치르는 공식 파티였지만, 그 날의 자리는 다분히 공직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정책연구관 7명을 위한 위로의 분위기가 강하였다.
그래서일까. 유독 나한테 술잔이 많이 왔다. 내게 서운하다며 술잔을 권하는 간부들마다 한마디씩 덕담을 하였다.
“당신은 문공부 보배였는데, 이렇게 아쉽게 보내게 되다니 참으로 섭섭하군요.”
나는 그들이 전해주는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그러다보니 위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 순간 울컥하는 울분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아 올라왔다.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장관!”
너무 큰 소리에 좌중의 눈길이 모두 나에게 와서 꽂혔다. 화기애애하던 술자리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 눈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숨소리를 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나는 장관을 부를 때 “장관님”이라고 ‘님’자를 반드시 붙였다. 그런데 그때는 ‘님’자를 떼내고 ‘장관!’ 하고 불렀으니 모두들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는 억울하게 공직에서 물러나는 판이니 화가 나서 장관에게 어떤 위해를 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문공부 직원들은 모두 내가 대학생 때 광화문 거리패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공부에서 ‘주먹’ 하면 ‘이종덕’으로 통할 정도였으니, 그들 모두 긴장할 만 했다.
그런데 정작 “장관!‘하고 큰 소리로 장관을 부른 나의 입장은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술김에 호기 있게 불러본 것인데,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는 정신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그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자리에 주저앉으면 내 모양이 아주 우스워질 수도 있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뚜벅뚜벅 걸어서 이진희 장관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무게 있게 걸으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 것인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좌중은 침을 꼴깍 삼키는 들린 정도로 조용하였다. 모든 눈길이 느린 걸음을 따라 내 등으로 쏠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나는 이진희 장관 앞에까지 바짝 다가갔다. 장관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봉변을 당할까봐 몹시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나는 두 손으로 장관의 양복 깃을 꽉 움켜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장관, 노래 한 마디 하시죠!“
그 소리에 좌중에서는 떠나갈 듯한 웃음과 함께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다가 한 순간에 분위기가 바뀌자, 이진희 장관도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고, 망년파티장은 더욱 흥겨운 자리가 되었다.
그 날의 망년 파티가 있은 이후 오랫동안 문공부 내에서는 나와 이진희 장관 간의 해프닝이 화젯거리로 등장하고 했다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