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그 기억을 되살리려니 가슴이 메어진다. 아픈 기억일수록 마음에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외아들 준호, 그 아이가 저 세상으로 가던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아마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아이의 죽음을 가슴의 못처럼 아픔으로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결혼 후 나는 딸만 넷을 두었다. 2대독자였던 나는 아내가 임신할 때마다 아들을 기다렸지만 매번 그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내가 ‘남아선호사상’을 가지고 있어 딸들이 태어날 때마다 서운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서운한 마음 아주 없었다고 말하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나는 생명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딸이든 아들이든 나와 아내 사이에 태어난 핏줄이기 때문에 매번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고, 아내에게 고맙게 생각했고, 태어난 아이에게 축복을 해주었다.
“정말 고생했어!”
나는 넷째 딸을 낳았을 때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여보! 아들이 아니어서.”
아내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살짝 눈물을 비쳤다.
“아니 괜찮아! 딸이 어때서? 딸 넷을 키워서 시집보내면 사위 네 명을 얻으니 얼마나 좋아.”
“당신은 2대 독자잖아요. 내가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할 텐데.”
아내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데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이 없으면 어때? 잘 난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 잖아? 그런데 우린 딸이 넷이나 되니 복이 넝쿨째 들어온 격이지.”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마음 한편으로는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였던 아버님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손자를 원하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만약 내 운명이 아들이 없다면 애써 아내에게 다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네 명의 딸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아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 2대 독자의 대를 잇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용하다는 한의사는 다 찾아다녔으며, 좋다는 한약은 다 지어다 장복을 했다.
세상에는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아내는 미신이나 다름없는 그런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반드시 아들을 낳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세웠다.
아내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나는 곁에서 방관자처럼 그런 아내를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아내의 갸륵한 정성에 감동하였다. 그래서 아내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화계사 뒤에 삼성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아내는 그곳을 찾아가 칠성각 앞에서 3일 동안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삼성암은 아내가 시집오기 전 아버지가 폐결핵을 앓고 계실 때 어머니와 함께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 절이었다.
또한 아내는 새벽 4시에 뚝섬 강변에 가서 방생을 하기도 하였다. 거북과 물고기를 한강에 놓아주면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아들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것을 뛰어넘는 열성까지 보였다.
심지어 아내는 집안에 온통 사내아이들의 사진을 붙여 놓고 있기도 하였다.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게 몇 개월 동안 야채만 먹도록 하였고, 오래도록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금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정해 준 날짜를 선택하여 잠자리를 갖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지극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지극정성의 노력 때문일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다시 아내는 임신을 하여 출산을 앞두게 되었다. 마침 출산이 임박했을 때, 나는 나무를 심기위해 현충사에 가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 1973년 4월 5일은 식목일이었던 것이다. 정부의 식목일 공식 행사이기 때문에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지만 나무심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한 아내가 걱정되어 온양에서 산부인과로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딸이네요. 지금 즉시 무조건 병원으로 오세요.”
평소 나는 자주 아내와 산부인과를 찾아갔기 때문에 간호사와도 잘 알고 있었다. 오다가다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또 딸이네요.” 할 때 농담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진담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나무심기 행사에 참여도 하지 못한 채 서울로 되돌아왔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나는 간호사의 말을 되새기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 딸이라면서 지금 즉시 무조건 병원으로 오라는 말이 좀 이상하였다.
그러나 나는 간호사의 말을 믿었으며, 비록 또 딸이라고 해도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하였다. 내심 서운하더라도 아내에게 만큼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기고 결심했다.
산부인과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나를 아기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저 아이예요. 득남을 축하드립니다!”
간호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고추가 달린 사내 아이였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하느님! 하느님! 우리 하느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곧 아내가 누워 있는 병실로 달려갔다.
“정말 고생했어!”
아내의 손을 잡고 말하자,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기뻐서 나오는 눈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내를 덥석 껴안아주었다. 그때만큼 아내가 그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순간도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님도 귀한 손자를 낳아줘서 고맙다며 아내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온 식구가 아들 하나 때문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나는 아들의 이름을 ‘준호’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끔찍이도 아끼며 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