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청춘_1 (4화)

나는 인생을 파도에 비유하곤 한다. 파도의 물굽이는 한번은 낮고 한번은 높다. 그렇게 높낮이가 반복되면서 출렁이고, 그 출렁이는 물결이 모여 파도가 된다. 바다는 늘 출렁이기 때문에 살아있다. 잔잔한 호수의 물이 썩는 것은 고여 있기 때문이다. 물은 생리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고요하기만 한 인생은 재미가 없다. 늘 파도처럼 출렁거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어야 한다. 고통과 즐거움이 반복될 때 살아 있는 생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아주 조용한 아이로 자랐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한국에서는 ‘쪽발이’란 소리를 들으며,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살았다.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완전히 ‘왕따’인생이었다.

그런데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나는 변하기 시작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순전히 왕따 당하는 설움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에게 더 이상 놀림을 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체력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의 청소년기는 어쩌면 어린 시절의 짓눌림에 대한 반항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잔뜩 짓눌려 있던 용수철이 어느 순간 튀어 오르는 것처럼, 운둥을 하면서 나의 내부에서는 반항아적인 기질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복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1학년 때 정식으로 유도를 배웠다.

▲ 경복고 유도선수 시절 유도부원들과 / 앞줄 가운데가 필자이다

나는 그때부터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였고, 힘께나 쓰는 운동부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힘자랑을 하기 일쑤였다. ‘내가 사나워져야 친구들이 얕잡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당시 나의 단순한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러한 판단이 주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친구들은 점차 나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에도 나는 학과 공부보다는 운동에 더 열성을 보여 레슬링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비원(현 창덕궁) 앞 문화극장에서 레슬링 첫 시합을 치르고, 이어 인천 애관극장 등에서 수차례 시합을 갖기도 하였다.

유도에 레슬링까지 하게 되자 내 주변에는 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들과 어울려 다니다보니 나는 어느새 광화문 거리패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당시 힘께나 쓴다는 대학생들은 신촌보다는 광화문으로 진출하였다. 광화문에서는 거리패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그들도 운동을 좀 한다하는 대학생들을 우습게 보지 못하였다. 우리도 거리패들 못지 않은 싸움꾼들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광화문을 누비고 다니던 거리패들은 이정재의 부하들이었다. 당시 종로와 광화문에서 활동한 아오마스, 동대문과 종로 4가에서 활동한 유지광, 서대문에서 활동한 최창수 등 3인이 ‘화랑동지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조직을 동원하여 오야붕인 이정재를 돕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한패거리는 아니지만 정팔이와 신상사 패거리들이 별도 조직으로 명동을 장악하고 있었다.

▲ 경복고 2학년 때 가장 친한 친구 이윤세와

내가 광화문 조직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닐 무렵, 운동하는 대학생들과 주로 들락거린 곳은 금강제화점 뒷골목에 있는 ‘황정유’란 커피숍이었다. 당시에는 육군본부나 헌병대 소속 군인들, 변호사 검사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그곳에 단골로 드나들었다. 대학생들 중에서는 주로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그리고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황정유’에 진을 치고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셨다. 폴 앵카의 팝송이 유행할 때였는데, 디제이가 틀어주는 음악 선곡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광화문 시절을 보내다가 대학교 2학년 때에 나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군대에 가서도 사회에서 놀던 기질을 버리지 못하여, 꾀병으로 육군수도통합병원의 ‘853’ 환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응급 환자를 그렇게 불렀는데, 이른바 ‘나이롱환자’였다.

당시 육군수도통합병원은 경복궁 맞은 편에 있었다. 나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병원정문을 드나들었다. 군복을 입고 버젓이 광화문에 진출하여 황정유에서 거리패들과 어울렸다. 나를 잡으려고 헌병들이 광화문에 나타났을 때는 거리패 오야봉 아오마스가 당시 화신 5층에 자리 잡고 있는 무랑루즈에 가서 그들에게 거하게 술을 대접해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커몽’이란 별칭의 오야봉이 이끄는 벙어리거리패들과 한판 붙었다. 당시 국제극장 앞에서 일대 활극이 벌여졌는데, 그때 나는 벙어리거리패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오른쪽 이마를 얻어맞아 육군수도통합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기도 했다.

당시 나는 기절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틀 만에 깨어났을 때 내 눈앞에 보무님의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님들 모습도 보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이 내 옆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많은 반성을 하였다.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었다. 그때 얻은 상처로 내 이마는 쑥 파였고, 그 파인 이마를 감추기 위해 머리를 오른쪽으로 내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군대에서 제대한 후 복학을 해서도 나는 여전히 운동하는 대학생들과 광화문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한번 어울리면 그곳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나의 단점이었다.

내가 처음 거리패들과 어울려 다닐 때는 그들이 ‘정의의 사도’처럼 느껴졌었다. 적어도 그들은 사나이답게 의리를 지켰으며, 비록 거리패 생활을 하더라도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불타는 가슴을 갖고 있었다. 험악한 거리패들에게도 그런 순수한 열정이 있어, 그것이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