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경영은 기획자와 배우와 관객의 삼박자가 하모니를 이룰 때 최고의 가치를 발휘한다. 기획은 좋은데 배우가 거기에 걸 맞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기획도 좋고 배우의 실력도 훌륭한데 관객이 별로 들지 않는다면 그 공연은 실패한다. 이 세 가지가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술경영의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가 필요하며, 그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각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
19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이 모스크바 국제무용협회에서 주최하는 ‘브노아 드 라 당스’에서 <카멜리아의 여인>으로 발레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최고 무용상을 수상했을 때, 한국에서는 그 수상 소식을 듣고 무용계와 관련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축하파티를 열기까지 하였다. 14986년 최연소 발레리나로 입단하며 13년 만에 세계 정상의 발레리나로 우뚝 선 것이다.
강수진 수상을 기념한 축하파티는 발레음악 평론가인 박용구 씨를 비롯하여 무용과 음악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호텔신라에서 열렸는데, 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수진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세우겠습니다. 기대하십시오. 반드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초청할 생각입니다.”
내 말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의 신빙성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초청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세계적인 발레단이 한국까지 오겠어요?”
사실 나도 세계적인 발레단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초청하는데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한국 출신의 강수진이고,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공연을 보고 싶다는데 예술경영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더 없이 좋은 여건이었다. 초청하는 일만 가능하다면 그 기획은 확실하게 성공을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2001년 초부터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초청공연 기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나갔다. 강수진은 1993년 존 크랑코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유명해졌는데, 그 다음해인 199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청하여 금의환향 무대로 그 첫 주역을 맡은 작품을 공연한 바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강수진으로서는 두 번째 무대인만큼 초청하는데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다만 독일 슈투트가르트가 세계 최고의 발레단인 만큼 이미 한 해 스케줄이 꽉 차 있을 것이란 예상은 하였다.
1999년 세종문화회관이 재단법인으로 탈바꿈 한 후 나는 자체 수익사업을 통한 수지균형을 맞추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2001년 초 갑자기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초청하겠다고 하자 일부에서 국내 발레 공연의 관객시장이 열악하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흥행면에서 매우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좋은 기획이고 강수진이 세계 일류급이므로 관객동원은 어떤 홍보 전략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기획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공연 일정은 벌써 1년 계획이 다 잡혀 있었다. 그 발레단의 최고 스타인 강수진의 고국에서 초청한다고 하자, 발레단 측에서도 대환영이었다. 문제는 세종문화회관 예산으로 볼 때 상당한 돈을 지불해야만 그들을 초청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연이 대 성황을 이루지 못하면 자칫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나로서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2002년 1월 중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2회 공연을 하기로 계약하고, 나는 그에 따른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공연작품은 강수진이 1999년 모스크바에서 최고 무용상을 수상한 <카멜리아의 여인>을 무대에 올리기로 하였다. 이 작품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잘 알려진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春姬>를 각색한 것으로, 안무는 존 노이마이어가 맡았다.
1978년 11월 4일 초연한 이후 현재까지 슈튜트가르트 발레단이 독점 공연권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작품이었다. 전체 3막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드라마틱한 내용에다 춤과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이 오묘한 조화가 잠시도 무대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발레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찬사였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Lady of the Camellias'인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동백꽃 아가씨‘였다. 어느 날인가 공연기획을 담당한 임형균 차장이 매우 난감한 얼굴로 내 방에 찾아와 말했다.
“사장님! 공연예술부장이 강수진 발레 공연 명칭을 ‘동백꽃 아가씨’로 하자고 합니다. ‘카멜리아의 여인’하면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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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브노아 드 라 당스 최우수 무용상 수상 축하모임을 가진 후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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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임형균 차장은 그동안 적절한 한글 제목을 찾기 위해 무용계 여러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도 ‘카멜리아의 여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는데, 정작 담당 부장이 ‘동백꽃 아가씨’로 하자고 하니 매우 난감한 이야기였다.
“그러면 임 차장 생각은 어때?”
나는 임형균 차장의 개인의견을 듣고 싶었다. 실무자이므로 관객입장에서 보는 시각도 갖고 있을 것이란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동백꽃 아가씨가 맞지만, 그 명칭은 어쩐지 전통 악극같은 느낌이 듭니다. 강수진 발레공연의 프로모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듣고 보니 임형균 차장의 이야기가 옳은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오래전부터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해온 공연예술부장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옛날부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국내에서 초연할 당시 ‘춘희’로 번역하여 무대에 올렸던 것을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알렉상드로 뒤마의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동백꽃 아가씨’로 번역된 적이 있었고, 그 후 다른 출판사에서는 춘희로도 출판되었다. 그런데 먼저 오페라에서 춘희를 써버렸으므로 이번에는 사람들의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백꽃 아가씨’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임형균 차장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동백꽃 아가씨’는 너무 고전적이었다. 1900년대에는 어울리는 제목일지 모르지만 2000년대에는 ‘카멜리아의 여인’이 시대 분위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였다.
2002년 1월 30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친 공연을 앞두고 나는 홍보전략에 최대의 관심을 두었다. 마침 세종문화회관 초청으로 한국에 오는 강수진을 MBC에서 특별프로그램으로 제작하여 세계 최고 발레리나의 삶을 조명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독일 현지에 가서 촬영한 이 프로그램은 뜻밖에도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특히 수많은 발레연습과 공연으로 뭉툭하게 일그러져버린 강수진의 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에 그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일반인들 사이에서 도대체 강수진이 누구냐라며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데 강수진은 공연 직전 귀국 인터뷰에서 전격적인 결혼을 발표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매니저이자 동시에 강수진의 개인 매니저이기도 했던 약혼자가 같이 입국하자, 온갖 언론에서 그들의 결혼이야기를 대서특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텔레비전과 신문의 뉴스는 공연의 흥행과 성공에 윤활유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카멜리아의 여인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며,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의상디자이너 앙드레김은 강수진의 결혼 소식을 듣고 그녀의 결혼식 드레스를 무료로 만들어 주었다. 또 공연을 할 때는 자신이 직접 티켓을 사서 각국 주한 외국대사를 초청하여 함께 관람하고, 언론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공연을 위한 간접적인 홍보효과도 거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버림받고 외로이 죽음을 맞이하는 여주인공의 드라마틱한 삶은 쇼팽의 애절한 음악과 함께 강수진의 아름다운 몸짓으로 표현되어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으며,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관객 점유율 100%에 유료입장 판매율 99%기록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중 1%는 극장 보유석과 귀빈 초청석이었다. 더구나 이런 세계적인 공연에서 세종문화회관의 서울시 교향악단이 반주를 맡았으니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카멜리아의 여인>은 2002년 한 신문사가 집계한 공연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연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공연을 통해 세종문화회관의 대외적인 위상도 크게 격상되었다. 재단법인 이전과 같은 단순한 국내행사 대관장소가 아니라 이제는 세계적인 공연을 직접 섭외, 기획하고 하우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공연장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강수진 개인으로서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공연으로 그녀는 2002년 삼성 호암재단이 주는 ‘호암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1억 원의 상금도 주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