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경영은 내 인생의 밑그림이...

화가는 작품을 시작할 때 밑그림부터 그린다. 밑그림이 잘되어야 그림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밑그림이야말로 절반의 완성이다.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고 나면 밑그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림 속으로 소멸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멸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자취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사라졌지만, 밑그림은 완성된 작품의 곳곳에 베어 은은한 예술적 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즉, 아름다운 소멸이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 몸으로 떠받쳐 다른 어떤 것을 빛내주는 헌신적인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예술경영을 내 인생의 밑그림이라고 생각해왔다. 예술경영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데, 그 예술이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때가 되면 자취를 남기지 않고 깨끗이 소멸해버린다. 캔버스 위의 밑그림이 완성된 작품으로 변하고 나면 드러나지 않듯이 예술경영도 예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예술은 많은 사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치를 발휘한다. 물론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하는 예술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진정한 가치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예술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을 꽃피운 예술가는 화려한 만찬의 주인공이 된다.

만찬은 언제나 예술가의 몫이다. 그 만찬이 이루어질 때까지 뒤에서 땀을 흘리며 준비를 한 예술기획자가 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전적으로 예술가가 받게 되어 있다. 즉, 예술기획자는 예술가의 눈부신 성공과 화려한 축복 뒤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뿌듯한 성취감과 동시에 허탈감을 동반한다.

내가 문화공보부에 들어간 것이 1963년도이니 꼭 40년째 예술행정 분야에 종사해온 셈이다.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예술과 더불어 살아왔다. 나는 지금 예술경영으로 내 인생의 밑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에 대하여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허탈감에 젖어 있다. 많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내 앞에 남아 잇는 것은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사람은 일을 하다가 갑자기 쉬게 되었을 때 허탈감을 느끼게 외어 있다. 2002년 6얼 28일 임기 만료로 내가 세종문화회관 사장에서 물러나면서 공직생활을 마감했을 때, 그 허탈감은 한창 잘 날던 방패연이 어느 순간 뚝 끊어졌을 때의 허망함과 다르지 않았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으니 감정적 정리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상태이긴 하였지만, 아쉬움과 미련은 어쩔 수 없는 공허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게 공직에서 떠나긴 했어도 그 후 나는 예술과 관련된 여러 단체의 장(長)이나 운영위원을 맡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명색이 장이나 위원이지, 내가 직접 어떤 일을 추진하거나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기 때문에, 세종문화회관 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내 인생의 화려했던 시절은 끝이 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나는 집에 가만히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몇몇 예술단체 사무실에 나가봐야 했고, 그동안 격조했던 예술인들과도 교유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공직생활을 떠나서 처음 맞는 연말은 조금 쓸쓸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바로 그 무렵 단국대학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2003년부터 단국대학교 대학원에 문화예술최고경영자 과정이 개설되는데, 나에게 주임교수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제의였고, 과연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예술행정에 대한 실무 경험은 누구 못 지 않게 쌓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체계적으로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없고, 학위조차 갖고 있지 않은 내가 과연 강단에 설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며칠만 시간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나는 전화를 걸어온 단국대학교 관련 교수에게 정중하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며칠간의 시간을 얻기로 하였다.

그 후 나는 며칠간 고민을 거듭하였다. 나 스스로에게 강단에 설수 있는 지의 자격을 붇는 것에 앞서, 과연 누가 나를 문화예술 최고 경영자과정 주임 교수로 추천을 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김상배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나의 경복고등학교 동기였기 때문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네가 나를 추천한 거냐?”
내가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물었다.

“아니, 나도 금시초문인데? 어찌됐건 잘된 일이다. 집에서 놀면 뭐하냐? 내가 생각해도 네가 공직에 있으면서 경험한 예술행정의 노하우를 썩혀두기 아까워. 그러니 딴 생각 말고 우리 학교 주임 교수로 들어와! 남들은 명예퇴직을 할 나이인데, 불러주는 데가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김상배 교수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내가 과연 강단에 설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긍하기 어려웠다.

며칠 후 다시 단국대학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결국 나는 주임 교수 제의를 수락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를 추천한 사람은 예술의 전당의 이세웅 이사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단국대학교 장충식 이사장과 친밀한 관계였는데, 문화예술의 최고경영자과정을 개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적임자로 나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세웅 이사장의 말에 장충식 이사장도 내 이름을 듣고는 전에 몇 번 본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는 장충식 이사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전 문화예술진흥원 기획이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나는 ‘평화의 댐 건설지원 범국민추진위원회’ 실무 사무총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단국대학교 장충식 총장도 부위원장으로 위촉되어, 그를 직책상 바로 상사로 모시는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 2010 차세대 안무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지원사업 심사에서 / 오른쪽은 무용가 육완순

어찌됐든 나는 2003년부터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 최고경영자과정 주임교수가 되어 커리큘럼을 짜고 주요 강사진을 선정 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사장직에서 물러 난 후 6개월간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결국 주임 교수가 되어 내가 맡은 일도 예술가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전혀 생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그동안의 인맥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신입생 모집활동에 들어갔다. 처음 개설한 것이기 때문에 예술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관계로, 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예술인 위조로 직접 전화를 하고 만나기도 하면서 홍보를 하였다.

그런데 예상 되로 반응이 좋아 40명 정원에 75명이 지원하였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인데, 애초의 계획대로 정원 40명만 뽑는다면 나머지 35명은 탈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대학 입시처럼 시험을 치르거나 까다로운 심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난감하였다. 결국 나는 여러 가지 사정을 설명하여 납득 가능한 7명을 다음 2기로 미루게 하고 1기로 69명을 뽑았다.

문화예술 최고경영자과정 1기로 입학한 사람들은 예술가들, 예술관련 단체장이나 간부들, 그밖의 기업인이나 일반인 등으로 각계각층이 다 모였다. 40대에서 70대까지 연령층도 천차만별이었는데, 그 중에 50~60대가 가장 많았다.

나의 첫 강의는 ‘체험을 통한 예술경영’이었다. 세종문화예술회관 사장 시절 한 학기 동안 세종대학교에서 ‘예술경영’에 대하여 강의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강단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더구나 강의 내용이 예술경영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나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다.

강의 내용은 결국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에 다름이 아니었다. 나는 이 ‘강의’라는 행위를 통해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처럼 과거 이야기를 되짚어가면서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나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이지만, 기실은 나의 내면 속에서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기정화 내지는 자기 위안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자위와 함께, 내 이야기를 세상에 내 놓아도 그리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고 자부하게 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술경영이라는 것이 예술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것이긴 하지만, 보람 있는 일인 것만은 사실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예술 자체적으로 볼 때도 하나의 형식이 있고, 그 형식 속에 정신이 담겨 있어야 진면목이 빛을 발한다. 언어를 예를 들면, 글자라는 형식이 있기 때문에 그 안데 정신을 담아둘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글자란 언어의 정심을 담아두는 그릇인 셈이다. 예술 또한 그것을 담는 그릇이 없다면 그 존재가치는 곧 상실되고 만다.

그렇다면 예술을 담는 그릇은 무엇인가. 예술이 너무 화려해 그것이 담긴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무대 예술의 경우 관객들은 화려한 무대 장치와 조명 속에서 예술행위를 하는 배우들을 보고 감동한다. 열광적인 박수갈채도 보낸다. 그러나 그런 예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장소와 그것을 유지 관리하고, 이끌어가는 제반 활동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형식이라고 이야기 할 때, 나는 예술경영을 통하여 예술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40년 간의 공직생활을 통하여, 실전으로 익혀온 예술경영에 대하여 나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또한 공직생활 마감으로 인한 허탈감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문화예술최고 경영자과정 강의를 통하여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예술경영이야말로 내 인생의 밑그림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