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카퍼레이드 (17화)

한때 ‘국위선양’은 정부의 외교활동에 있어서 ‘캐치프레이즈’같은 것이었다. 세계지도상으로 볼 때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것처럼 아시아 대륙 동쪽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세계 사람들에게 나라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해방이 되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나라를 일본의 속국 정도로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오래 전에 6.25전쟁을 치렀는데도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던 시절, 체육인들이 외국에 나가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각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주재하고 있지만, 국위선양 차원에서는 체육인만큼 실효를 거두기 쉽지 않다. 일단 세계적인 대회에서 메달을 따기만 하면 전 세계 방송과 언론들이 뉴스와 기사를 내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육인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오면 국내에서도 김포공항에부터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신문과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뉴스를 내보낸다.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러웠다. 예술인들도 세계 무대에 나가 한국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세우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체육인만큼 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이 나의 큰 불만이었다.

1974년 당시 나는 문공부 문화과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국가 행사 때의 공연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러시아 모스크바로부터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차이쿠프스키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러시아는 예술의 나라다. 특히 발레와 음악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나라이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들이 경합을 벌이는 대단히 큰 무대인 것이다. 그 무대에서 정명훈이 1등 없는 2등을 하였으니, 이것은 정말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쟁쟁한 실력을 가진 서양의 음악가들을 제치고 동양인이, 그것도 조그만 나라 한국에서 온 피아니스트가 세계 최고의 음악가 반열에 오른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국장석으로 달려갔다.

“국장님! 우리의 정명훈이 해냈습니다! 금메달을 땄단 말입니다.”

“금메달이라니? 정명훈이 뭐 손기정 같은 마라톤 선수라도 된단 말이오?”

“소련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입상을 했단 말입니다. 그것도 1등 없는 2등이니 금메달이나 다름없지 뭡니까!”

나는 내가 마치 금메달을 딴 것처럼 들떠 있었다.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오?”

“정명훈이 한국에 돌아오면 김포공항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겁니다. 체육인들은 금메달만 따면 카퍼레이드를 벌여주는데, 우리 예술인들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 1997년 예술의 전당 재직 시절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과

“그것 참 괜찮은 아이디어로군.”

국장은 의외로 쉽게 내 제안에 찬동했다. 그리고 곧 정식 절차를 밟아 장관의 허락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나는 신바람이 났다. 내가 마치 카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듯, 그 다음날부터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국가대표 선수들만이 카퍼레이드를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나는 간혹 미스코리아 입상자들이 카퍼레이드를 벌인 적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미스코리아대회를 주관하던 한국일보에 부탁하여 카퍼레이드 오픈카를 빌리는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정명훈이 입국하는 날, 나는 김포공항에 나가 카퍼레이드 이벤트를 총괄 지휘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던 정명훈은 뜻밖의 환영객들을 보고 깜짝 놀란 눈치였다. 정명훈은 곧 화환속에 파묻혔고, 화환을 목에 건채 그는 어머니 이원숙 여사와 함께 빨간색 스포츠카인 카퍼레이드용 오픈카에 올랐다.

나는 대한뉴스 제작진 차에 타고 오픈카의 뒤를 바짝 쫓았다. 당시 극장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반드시 대한뉴스를 내보내곤 하였는데, 대한뉴스 제작진이 정명훈 카퍼레이드 장면을 촬영한다는 것은 그가 세계적인 음악가로 우뚝 서서 한국을 빛낸 인물임을 시사 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날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의 카퍼레이드는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오픈카가 시청앞에 나타나자, 축하객들은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정명훈과 그의 어머니도 놀랐고, 이벤트를 주도한 나도 놀랐다. 내 뇌리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정명훈 카퍼레이드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한국의 예술가들에게도 사기를 진작시켜주고 한껏 자존심을 세워준 대단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정명훈은 물론 그 어머니 이원숙 여사와도 아주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되었다.

지난 1999년 12월 18일 정경화의 앙코르 독주회가 열렸을 때, 그녀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자신의 독주회가 열리게 된 것을 대단히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녀의 연주회는 많이 열렸지만,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미 대관이 끝난 상태에서 그녀의 독주 장소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녀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열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원숙 여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말을 탄생시킨 맹자의 어머니 버금가는 세계적인 예술가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자식 사랑은 대단해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예술가 이상 가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예술가로 ‘정씨 삼남매’를 키운 이원숙 여사야말로 대단한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3남매 예술가의 열정은 그 어머니의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