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돈가방 (14화)

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때로는 고통스런 일이라 할지라도 당시의 그 감정은 지워진 채 한 장의 그림 정도로 남는 것이 추억이다. 그래서 추억은 아름답다. 슬픔도 고통도 세월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추억의 장면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때 생각을 하면 살이 떨리는 기억이 하나 있다. 몇몇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비밀에 붙여두고 있었던 이야기다.

비밀도 세월이 얼마만큼 흘러버린 후에는 우스갯소리가 될 수 있고, 간혹 추억거리로 옛날을 반추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그것이 비밀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혼쭐이 났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면과 육영수 여사와의 특별한 부탁 때문인지 문공부에서는 믠헨올림픽 예술단에게 특별히 신경을 썼다. 최고급 의상을 해준 것은 물론이고, 현지에 체류하면서 활동하는 경비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출국절차에 이르기까지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믠헨올림픽 예술단 단장은 임병직 전 외무부장관이 맡았고, 나는 총무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연진은 김소희, 박귀희, 한영숙, 강선영, 송범, 전황, 김문숙 제씨 등 이름만 대도 다 알만한 유명스타들이었다. 반주자로는 대금의 이생강 씨, 피리의 박범훈 씨 등 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용단까지 포함하여 총 50명이 독일 믠헨으로 가는 것이니, 당시 해외 예술공연단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나는 그들 50명의 출국에서부터 현지 체류 기간 동안 안전하게 인솔하는 책임을 지고 어깨가 매우 무거웠다. 더구나 독일 믠헨올림픽의 개막식을 필두로 하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등 유렵 전역을 다 돌면서 공연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유럽을 순회한 후에는 중동의 각 나라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세계 총 24개국을 돌면서 약 4개월 간에 걸쳐 우리나라 민속음악과 전통 춤을 공연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예술단 순회공연이기 때문에 특히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드디어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공연단을 이끌고 독일 믠헨올림픽에 참석하였다. 몇몇 단원들은 해외에 자주 나가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처음 외국 땅을 밟는 것이라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부터 매우 흥분된 분위기였다.

믠헨올림픽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서양문화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동양문화, 그것도 한국 전통문화를 선보인 우리 예술단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어주었다.

우리는 독일에서 곧바로 영국으로 갔다. 영국은 우리가 믠헨올림픽을 끝내고 대장정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나라였다. 영국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우리들을 호텔까지 태우고 갈 리무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로 향하면서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이국적인 런던의 도시풍경들은 단원들 모두의 눈길을 붙들어 떼어놓기에 충분했다.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도시의 화려한 번화가의 높은 빌딩들에 넋을 놓고 있었다.

리무진에서 내려 각자 단원들에게 호텔객실을 정해 준 후 나는 홍보협회 경리부장 조오제 씨와 함께 프런트에 남아 있었다. 조오제 씨는 단원들이 체류하면서 쓸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솔책임자인 나와 함께 같은 객실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 임병직 씨를 단장으로 한국민속예술 단원들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 중 카이로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탚 앞에서 / 셋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필자

그런데 객실로 올라가던 조오제 씨가 갑자기 소리쳤다.

“앗, 돈가방!”
“돈가방? 그게 어디 있어요?”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쿠, 큰일 났다. 돈 가방을 차에 놓고 내렸네!”
조오제 씨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은 현지 은행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그때그때 인출해 쓰게 되지만, 당시만 해도 필요한 경비를 돈가방에 가득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경리 책임을 맡은 조오제 씨가 돈가방을 리무진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었다.

나는 급히 호텔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이미 리무진 버스는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열쇠를 받아 각자 단원들에게 객실을 배정해주느라 시간이 꽤 많이 흘렀으니, 그때까지 리무진 버스가 호텔입구에 서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돈가방을 찾지 못하면 영국 땅에서 50명 단원 모두가 졸지에 국제미아가 될 판이었다. 호텔비는 물론이고 당장 식사할 돈이 없으니 이건 국제 미아가 아니라 국제 거지로 전락할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당시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이수정 공보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수정 공보관은 나중에 문화공보부장관까지 지낸 사람이다.

나는 아무튼 이수정 공보관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수정 공보관은 곧바로 호텔로 갈테니 꼼짝 말고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조오제 씨와 함께 호텔 입구에서 안절부절 못한 채 서성거리며 별의별 생각을 다 하였다. 예술단 경비는 총 3억 7천만원이었다. 1972년도니까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판다해도 8천만원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조오제 씨의 집을 팔아 합한다고 하여도 잃어버린 돈의 액수에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집을 팔아도 안 되는데, 이걸 어쩌지요?”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돈도 돈이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면 국제적 망신이다.”
조오제 씨는 얼굴을 감싸 쥐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지금 기억을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날 템스강에 가서 빠져 죽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얼마 후 이수정 공보관이 호텔에 나타났다. 여기저기 여행사를 통해 수소문해본 결과 우리가 공항에서 호텔까지 타고 온 리무진 버스 회사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버스 회사를 찾아갔을 때는 벌써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회사 주차장에서 우리가 탔던 리무진 버스를 찾아내긴 했지만, 버스는 문이 잠겨 있었다. 할수 없이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분초를 다투는 듯한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드디어 아침 7시 30분에 리무진 버스 기사가 출근하였다. 그는 흑인 기사였는데, 우리가 가방 이야기를 꺼내자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사무실 캐비닛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가방을 꺼내주었다. 기사가 보지 못하게 살짝 가방을 열어보니 다행히도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는 흑인 기사에게 500달러를 주었다. 기사는 웬 돈이냐며 아주 좋아했지만, 우리는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돈 가방을 들고 버스회사 정문을 나설 때 나는 50년은 감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돈가방 잃어버린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조오제 씨, 이수정 공보관, 그리고 주변의 몇몇 사람에 불과하다. 도무지 어이가 없는 일이어서 이야기조차 꺼내기 두려웠던 것이다.

나중에 조오제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리무진 버스에 탔을 때 바로 옆자리에 무용가 최희선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열정적인 대화에 홀려 호텔에 도착했을 때 돈가방을 들고 내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깜빡 잊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