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까?_2 (4)

어느 날 두 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동안 나는 침실에서 서랍정리를 하고 있었다.

미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준우야 이거 뭐야?” 하자 아들이 어눌한 목소리로, “응, 그거 토끼인형이야.” 한다. 그러자 미셸이 “이거 나 가져도 돼?” 한다.

“응.”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저 녀석 봐라?” 하는 참에 미셀이 “이건 뭐야?” 하니, 아들이 “응, 나팔인데?” 하고, 곧이어 또 다시 미셀이 “이것도 나 가져도 돼?” 하니, 망설임 없이 또 “응.” 하고 대답한다.

그때 그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맥없이 자기 물건을 달라는 대로 내어주는 아들이 어처구니없이 보이고, 울화통이 치미는가 하면, 그런 물건을 달라고 하는 미셀에 대해 어린애에 대해 느끼기에는 가당찮은 분노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것 같다.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한테 아들을 뺏겼다고 생각하고 어리버리한 아들이 맹랑한 며느리한테 맨날 당하고 산다고 생각하시는 피해의식을 갖는지 이해할 수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적어도 며느리 구박하고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는 안 될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생뚱맞게 밀고 올라오는 심술궂은 심사에 혼자 속으로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내 결혼에 대해 느끼셨을 박탈감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당시에 아버지께 야멸찬 말로 대꾸했던 자신이 철없이 느껴진다.

주인공이 누구지?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멀고 어려운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같은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거의 생각도 못하고 산 세월이 한 30년은 되었던 것 같다. 그때 늘 궁금했던 것은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시며 살아가실까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말씀이 많지 않으신 데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도 집에서 아버지를 만날 시간은 아침에 출근 준비하시는 시간과 저녁에 일일 연속극을 함께 보는 시간정도뿐이었다.

TV를 볼 때도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매일같이 보는 TV연속극에 나오는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혹은 누구나 다 아는 배우 이름에 대해 거의 매일 “저건 누구냐?” 하고 똑같이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거의 “도대체 저 연속극 끝날 때가 다 되어가는 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시는 걸까?” 궁금해질 만큼 내용파악을 못하고 계시는 거다.

그런데 내가 요즘 구멍가게 같은 사업을 벌여놓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다보니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몇 번씩 본 영화를 보면서도 앞에 무슨 장면이 있었는지, 플롯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갈등관계로 엮어져 있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저 영화배우 이름은 잘 모르겠어서 함께 보고 있는 남편에게 “저 사람은 누구야?” “저 사람이 왜 저래?” “저 배우 이름이 뭐지?” 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혼자 생각한다. “그래, 전 세계의 경제를 머릿속에 넣고 계신 분이 일일 연속극 주인공을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

▲ 여주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우리집 4대 / 왼쪽에서부터 장모, 아내, 셋째딸 송미, 송미의 아들 준우

아버지의 화법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나름대로 확고한 화법이 있으시다. 어떤 일에 대해 본인이 가진 생각을 절대 먼저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늘 무슨 일이 있으면 얘기의 허두(虛頭)만 꺼내신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갖고 계신 복안은 절대 먼저 말씀 안 하신다. 상대방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얘기를 할 때 까지 혼자 삼수갑산을 넘든 곤두박질을 치든 내버려두신다. 그러다 일이 제대로 풀리면 가만히 계시지만 이게 아니다 싶으면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아버지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시거나 끝까지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으신다. 옛날 석유공사에 걔시던 어느 분이 그 일에 대해 힘들어 죽겠다고 툴툴대던 기억이 난다.

그 버릇이 지금도 여전하시다. 지금은 지은 지 80년이 넘는 신교동 집을 새로 짓는 일에 대해 아버지께서는 전혀 그럴 뜻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 가족은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지난 5년에 걸쳐 나는 도면으로 신교동 집을 세 번 정도 신축했다.

엄마는 죽기 전에 남들처럼 편리한 현대식 아파트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아버지 앞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러구려.”하고 대답하신다. 그러면 엄마는 내게 법규를 알아보고 설계를 해보라 하신다. 나는 한두 달에 걸쳐 설계도를 완성해서 의논드리러 간다. 도면을 보신 아버지는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시다. 그렇게 한 1년이 지나면 그 일은 없던 일이 된다.

그리고 또 얼마 있다가 여주에 있는 산장을 뜯어고치고 나서 새집의 편리함에 대해 엄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면 “그럼 신교동 집을 한번 고쳐보지 뭐.” 하신다. 그러면 나는 또 죽자 사자 그 일에 매달려 이렇게 저렇게 그림을 가져다 드린다. 그러면 이번에는 한국 안에 있는 어떤 목수도 이 집을 안전하게 재건축할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또 그렇게 1년쯤 지나면 그 일도 없던 일이 된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신교동 신축에 대해 기본적인 안을 취합하고 건축을 하는 사촌동생에게 설계를 의뢰하려는 즈음에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다시 집을 지으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이제 이쯤해서 잊어버리자.”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마음을 접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신교동 집에 대한 향수와 애착은 우리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편리하고 기능적인 집을 지을 형편이 되고 연세 드셔서 편하게 사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와 65년, 52년을 같이 산 엄마와 나는 아버지의 말없는 의견을 알아듣는다. 이게 아버지의 대화법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전 사장 입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하고 뾰로퉁하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에 익숙하지 않으신 아버지를 처음 대면한 남편이 기업입사 시험의 최종 면접시험관 같았다고 회상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오랜 시간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옛 지인들도 초기의 아버지의 force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바늘방석에 앉은 듯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시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