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만(尹振萬) 하이텍산업기술(주)
12라운드의 판정승
얼마 전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전민제 회장님 미수 잔치가 있었습니다. 가족 분들의 초대로 옛날 1960년대 대한석유공사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정유공장 창설 당시 기술자들 모임(KOCO클럽)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미수잔치 후 우리끼리 잔치 뒤풀이 모임을 갖고 있는 자리에 전 회장님과 함께 나 교수님이 오셔서 “가족끼리 힘을 모아 미수기념 논문집을 내고 있는데 곧 발간될 것”이라 하시며 “또 하나의 책을 발행해 드리려고 하는데, 그 책에는 전 회장님과 짧든 길든 과거에 함께 하셨던 분들의 전 회장님에 대한 글을 받아 모아 넣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좋은 이야기이던 좋지 않은 이야기이던 주시는 대로 그대로 싣는 것이 더 소중할 것 같다” 하시며 글을 부탁하셨습니다.
우리 KOCO클럽 회원 몇 명의 원고를 수집하려는 박종률 사장께서 가끔씩 원고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는 물음을 주지만,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전혀 쓸 생각을 못하고 있어 그때마다 나는 안 쓴다고 답하곤 하였습니다.
박 사장은 그러한 나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전 회장님과 가장 오랜 사회생활을 한 친구가 왜 안 쓰겠다고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습니다. 하기야 내가 전 회장님과 함께 사회생활을 한 것이 35년간 이었으니 아마 가장 오랜 한 사람일 겁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 열중하고 옛날 것을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어 옛날 일들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당 전민제 미수기념 논문집> 한 권을 택배로 받았습니다. 받자마자 관심이 쏠려 그 내용을 대충대충 넘겨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시느라 그동안 바쁘셨구나’ 하면서 옛날 일들을 잠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당하셨던 그 무너질 듯한 아픈 가슴을 이러한 귀중한 일들을 하시면서 참고 견디어 내셨구나.’
어려움 속에서 일구어 낸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 이수화학을 환갑을 지내고 얼마 안 되어 대우그룹에 넘기고 혈혈단신 새로운 일에 전념하셔서 불굴의 정신으로 오늘까지 오셨습니다. 환갑 넘기면 은퇴하는 보통사람들과 달리 그 큰 충격에 그로기(groggy) 상태가 되셨는데, 다시 추슬려서 힘내시어 12라운드 판정승하셨습니다.
“애 늙은이가 제일 싫다”
회사 운영을 끝내시면서 젊어서 하지 못하셨으나, 하고 싶으셨던 연구, 학회 활동을 마음껏 하시며 우리나라 화학, 기술 분야의 줄기를 이어주셨습니다.
제가 전엔지니어링에서 전 회장님을 모시고 일하던 30여년 전 함께 하던 미국 출장 중 전 회장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이 먹었다고 결재서류 도장이나 찍고 사는 그런 애늙은이가 제일 싫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생활철학 속에 사셨기에 70은 청춘이고, 80대에도 그 많은 연구활동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교훈이 되어 저도 아직도 작으나마 회사운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하려고 합니다. 전 회장님보다는 14년 뒤늦게 쫓아가고 있습니다.
|
|
| ▲ 1987년 개최된 아시아화학 학술대회에서의 이당 (우측) |
|
지난 해 12월 12일(토)에는 KOCO클럽 일행을 따라 예약된 전 회장님 여주농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참 오래간만에 오는구나.” 혼자 생각하며 송남농원이라는 간판 붙은 두 기둥 사이의 문을 들어섰습니다. 옛날 보다는 잘 정리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옛날 일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26년 만에 방문하게 된 이곳, 그 전에 10여년 간 수없이 다녔던 이곳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 이수화학이 대우그룹으로 정리된 다음의 방문이 첫 번째였습니다. 농장은 그동안 많이 길들여져서 이제는 멋있는 시골별장이 되었습니다. 전 회장님 내외분이 소개해주셔서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예전보다 여기저기 건물이 많이 늘었고, 최근에 개조하셨다는 안채는 내부 구조가 아주 최신식 한ㆍ양식 디자인으로 훈훈한 분위기였습니다.
막내 따님이 영문학 전공하고 실내장식계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 따님이 디자인 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실 겸 서재로 사용하시는 건물도 잘 정리되어 있고, 전 회장님 서재 가꾸는 솜씨는 똑같았습니다. 손수 분류하여 정리하셨다는데, 그 규모가 무척 컸습니다. 실험실도 옆방에 있었는데, 젊은 시절 사용하시던 실험실을 옯겨 놓으신 것 같고, 이곳 여주에 농장을 개척하시면서 틈틈이 가축 분뇨를 이용하는 대체 농촌 연료인 매탄가스 발효연구 때 사용하시던 잔재들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옛날에 전 회장님으로부터 여러 번 들은 이야기가 있어 이곳 농장을 감상할 때 일행들에게 한마디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 회장님이 옛날에 이렇게 말씀 하셨어. 사람은 20년 키워도 나무 20년 키우는 것만 못하다. 20년 키워 잘 되는 사람도 있지만 잘 되고도 도망가는 것이 사람이다. 나무 20년 키우면 늠름하게 자라서 그 자리를 지키고서 만날 때마다 주인의 마음을 감싸준다.”고. 이 이야기는 전 회장님이 전엔지니어링을 운영하시던 시절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 회사의 급여가 낮은 편이었습니다. 전 회장님은 나라의 경제 사정이 급여가 높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엔지니어링 분야를 시작하는 대기업들이 훈련된 기술자들을 뽑아가려고 급여를 높게 책정함으로써 많은 인적 손실들을 보았었습니다.
손실된 인력들은 여러 엔지니어링 회사로 흩어졌지만 현금의 우리나라 거대 엔지니어링 회사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떤 친구는 전엔지니어링 주식회사는 회사가 아닌 기술교육기관이라고 폄훼하기도 했습니다.
여주농장의 수목들은 초기의 것들이 벌써 3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그럴 듯한 숲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숲은 더 좋은 숲으로 바뀌어가겠지만, 그곳에 어울리는 삶의 흔적들도 무한하기를 바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박 사장에게 글을 안 쓰겠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의 옛날 기억을 살려주었기에 이러한 기억들을 정리하여 박 사장에게 전해주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1959년 초여름
전 회장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59년 초여름, 내가 대학원(연세대 화공과) 1학년 때 한미화학(해림화학도 함께 있었음)에 입사할 때였습니다. 나중에 뒷 이야기지만, 1년 선배인 같은 화공과 이선종 선배가 그곳에 입사하였는데, 일을 너무 잘 해서 전 회장님으로부터 후배 한 친구 데려다가 같이 일하라고 하셔서 연세대 화공과에 1명의 취직 의뢰를 하였다고 합니다.
대학원에 나 하나만 진학하였는데, 대학원 선배들은 모두 입대하고 나 혼자 있을 때 그런 의뢰를 받아 내가 직접 그 회사에 갔습니다. 서울 뚝섬에 두 개의 아담한 공장이 있었고 본사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다면 아주 작은 공장이겠지만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이곳 말고는 볼 수 없었던 공장이었습니다. 하나는 접촉식 황산공장이고 하나는 황산과 고령토를 이용하여 황산반토(수돗물 정제할 때 침강제로 이용)를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공장들은 모두 공장 안에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곳 황상 공장의 옥외시설이나 황산반토 공장의 장치들이 모두 학교에서 배운 ‘Unit Operation(단위 조작)’에 나오는 장치들이어서 이곳에서 일하고 싶어졌습니다.
“대학원을 계속 다니게 할수 있게 해주신다면 제가 입사하겠습니다.”고 하여 입사하게 되었고, 이때 고인이 된 성정자 여사도 그 회사의 과장으로 계셨습니다. 회사에 들어간 후 알았지만 이 황산합성 공장을 전 회장님이 설계하시고 세우셔서 그 업적으로 전 회장님이 1958년 자연과학부분 서울시 문화상을 받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