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홍 | 前 전엔지니어링 부사장
정부의 실수
걸프오일이 유공에 합작투자 한 후 1970년부터 경영권을 행사하기로 하면서 전민제 부사장을 걸프 몫인 수석 부사장(CEO)으로 추천했다는 미확인 소식에 KOCO의 엔지니어들은 크게 기대했으나 실망스럽게도 우리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유공은 정유시설의 확장과 석유화학사업을 시작하면서 종합에너지와 석유화학의 기반을 이루어야 할 중요한 시기에 경륜과 비전을 갖춘 전문가가 총괄하면서 이끌어주기를 바랐으나 아쉽게도 전 사장께서는 8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셨습니다.
같은 국영기업체인 포항제철의 경영자를 일관성 있게 지원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사례와 견주어 볼 때 훌륭한 인재를 중용하지 못한 우리 정부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공은 정유시설을 계속 확장하는 한편 3대 신규사업을 시작하면서 전 사장(약칭 MC)에서 나프타분해공정 프로젝트에 박종률, 윤활유 사업에 문동민, 장거리 송유관 및 저유소 사업에 나를 각기 프로젝트 담당 차장으로 임명하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는 명예로운 직책으로 걸프의 프로젝트 매니저와 함께 일하면서 프로젝트 관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00km의 송유관로를 확보했고, 고압 파이프 및 중요 기자재 구매까지 완료했기에 국영기업체에서 일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 아내와는 상의도 하지 않고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전 사장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분이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한국의 기술산업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확실한 기대와 그 기초를 닦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한양대 화공과를 갓 졸업한 김태원 군과 세 사람이 창업준비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회사 이름은 전엔지니어링(CEC)으로 하고 영업부장의 직함을 부여받았는데, 기술영업을 어떻게 할 것이며 돈을 벌여 들여야 할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회사이름을 ‘엔지니어링’이 발음하기 어렵거니와 알아듣지도 못하는 고충을 겪었습니다. 당시 사회 통념상 창업자의 이름을 붙여서 회사명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포괄적으로 사업내용을 나타내는 평범한 상호이기를 바랐습니다. 회사를 홍보하고 일거리를 얻어 와야 할 텐데 종합공장건설 엔지니어링과 소프트웨어 기술의 개념을 모르는 고객들에게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어느 고객은 재봉틀 같은 기계류를 제작하는 회사냐고 되묻기도 해서 난감할 때가 있었습니다.
경험 있는 기술자를 영입해서 조직하자는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MC의 지론은 경력사원을 스카우트하기 보다는 새로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킨 후 일하게 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드디어 화공, 기계, 전기 전자 및 토목분야로 50명을 공채하였는데, 경력사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선 Fluor 회사가 호의를 베풀어 보내준 엔지니어링 스탠다드와 Engineering Standard와 Standard Speeification을 CEC의 표준으로 적용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한국공업표준이 아직 마련되기 전이었으므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허공을 맴도는 듯 했습니다.
인재양성
어느날 안동혁 박사님이 전 사장을 격려하기 위하여 방문하셨습니다. 회사 현황을 설명해드리라고 하시기에 회사 실적도 없고 내세울만한 시설도 없는지라 강의실 같은 사무실에 신입사원을 소개했습니다. 면접시험을 보면서 이름을 파악했던 터라 앉아 있는 순서대로, 이름, 출신학교와 전공, 졸업년도를 한 사람 한 사람씩 소상하게 설명 드렸습니다.
다 듣고 나신 후 안 박사님의 소감 말씀이 “민 부장, 어떻게 그 많은 사원들의 신상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느냐”고 칭찬하시면서도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이 시작하는 회사의 장래를 염려하셨는지 “훌륭한 목수는 재목을 탓하지 않는다네.”라고 짧은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MC의 지도를 받으며 일한 경험과 더불어 나의 생활신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직원은 늘어나는데, 버젓한 수입이 없어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니 영업부장으로서 부질없는 근심만 늘어갔습니다. MC는 현실보다는 이상과 완벽을 추구하는 분이라 장기계획에만 주력하시는 듯 했습니다.
얼마 후에 제도사 지망생을 모집하고 강남에 위치한 과총회관 1개 층을 빌려서 훈련소를 개설하였습니다. Fluor에서 보내준 교육교법으로 배관과 계장(Instrument)설계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정부기관에서나 해야 할 기술훈련소를 개설한 것입니다.
햇병아리같은 엔지니어와 제도사들이 훈련과 실무를 거치면서 경험을 쌓게 되자 외부회사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었습니다. 마침 해외건설 붐이 일어나자 후한 급여와 좋은 조건들을 제시받은 직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과학기술연구소 같은 최고의 연구기관에서 조차 CEC엔지니어들을 스카우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a박사 연구실로 가겠다고 사직원을 낸 직원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는가. 그 선배를 찾아가서 사람이 필요하면 자체적으로 교육시켜서 인재를 키울 것이지 어려운 여건에서 민간기업이 양성해 놓은 사람을 빼내면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한 일도 있었습니다.
많은 돈을 투자하고 정성을 쏟아 훈련시킨 직원을 빼가는 현상에 대해 MC도 기분이 나쁠 것이지만 오히려 “CEC Engineer를 다른 회사가 꼭 필요해서 데려간다면 말리지 말라. 그들의 지식과 재능이 결국에는 우리나라 기술개발 분야에 이바지할 것이니 순리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회사를 경영하려면 때로는 현실과 타협도 해야 하지만 MC는 이를 외면하고 원칙과 이상추구로 일관했습니다. 특히 정치권과 영합하는 것을 멀리했는데, 어쩌면 그런 성품 때문에 불이익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Fluor회사 등 그 외의 유력기업에서 그들의 지회사거나 공동운영 제안을 받은 바 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이는 민족기업으로 자주성을 지키고 창의력을 개발하려는 의지 때문이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전 사장께서 소원했던 대로 CEC에서 함께 일했던 엔지니어들이 각 분야에 진출하여 한국의 현대화와 기술 분야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2011년 1월 토론토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