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영원한 보스, 영원한 스승_4 (8)
  제8장[부록] 후배들의 회고담

1967년 - 새로운 출구, 나를 구해준 석유화학사업

1966년에 정부의 석유화학개발계획이 수립되고 1967년에 회사는 석유화학 기초원료인 에틸렌-프로필렌 생산에 필요한 나프타분해시설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과제추진팀이 구성되고 팀장이 되어 걸프오일 측에서 파견한 사업개발부장 비토 카펠로 및 김연식 씨 등 동료와 힘을 합쳐 사업계획을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로부터 실수요자(實需要者)로 선정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회사의 석유화학산업 진입 결정은 물론 이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석유산업의 계열산업에 대한 선발주자가 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 정유산업에 대한 잠재적 경쟁자의 진입을 봉쇄하기 위한 목적 또한 당면한 과제였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국화학은 간이 정유시설, 화력발전시설, 나프타분해시설을 포함한 종합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음)

과제추진팀을 대표하여 사장으로부터 유공자표창을 받게 되었던 바 1965년에 공장장의 징계를 받고 1967년에 사장의 표창을 받는 특별한 경우라고 당시 성정자 과장께서 진심으로 축하하여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로서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였고, 공헌도 적은 정유관련 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야인 석유화학 관련 업무를 위하여 저를 추천하여 주신 성 과장과 저를 활용하여 주신 이사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후에 저에게 계속하여 활기 있는 일과 좋은 인연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사는 나프타분해시설 사업허가를 받았으나 마치 낙원 같은 사택의 남쪽에 울산석유화학 단지가 들어오는데 동의하여 주었습니다. 대의를 위한 이사님의 결단이었습니다. 또 이사께서는 신설공장 배치를 논의하시던 어느 자리에서 울산공장과 사택을 잇는 선의 동쪽 반도를 모두 취득하고 싶은데 걸프오일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지가 차츰 가격이 올라가고 희소해질 수밖에 없다는 미래예측을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후일 이 말씀을 여러 후배들의 교육용으로 원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 자신이 회사부지의 선점, 울산단지에 확장을 위한 부지를 마련할 때에 대지의 교환, 군산산업단지에 공격적인 대지의 확보, 대덕연구단지에 대규모 단지 확보, 서산에 새로운 공장부지 조성 검토 등 이사로부터 받은 학습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 국내 최초의 석유화학 공장인 울산 나프타분해공정(NCC) 공장 [SK종합화학 제공]

이사께서는 대학 교수 몇 분에게 연구비를 지원하시고 화학회와 화공학회의 활동을 지원하셨으며 화학회관의 건립자금 조성에 큰 몫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범을 따라 제가 후일 나름대로 학회활동을 지원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평생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장기연구비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유공연구실(후일 김연식 부사장이 연구건물로 확대)을 개설할 수 있었습니다.

1968년 - 첫 미국출장, 인간적 관계구축과 멘토링

1968년 3월 창설된 석유화학부 기술과장(부장 이홍석, 업무과장 김연식)으로 승진하고 NCC 건설을 위한 입찰 안내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텍사스의 휴스턴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동경까지는 이사님과 동행이었습니다.

동경비행장에는 걸프오일 아시아 사장인 힐 보닌(Hill Bonin)이 이사님을 마중 나와 있어서 동경시내까지 그 차에 동승하였고 시내에 도착하여 저는 오랜 인연의 아는 분(어릴 때 서울에서 우리집안의 가정의였던)이 은퇴 후에 경영하던 여관(고라쿠엔 근방)으로 가기 위하여 하차하고 이사님은 호텔로 직행하셨습니다.

헤어질 때 이사님은 오전 몇 시까지 호텔로 오라는 지시는 주셨는데, 저는 여관의 전화번호를 알려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그날 저녁 동경 일대에 때 아닌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이사님 생각에, 일본어도 할 줄 모르는 제가 동경 시내에서 홀로 눈 속에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호텔로 찾아뵈었더니 무척 반기시는 것이었습니다. 밤을 새우시며 동경 시내에 있는 수많은 여관에 확인 전화를 하셨다며 안도 끝에 하시는 말씀, “동경에 버려놓아도 굶어죽지는 않겠구먼.” 회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한 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휴스턴에 도착하니 바로 카펠로 내외가 비행장에서 저를 맞이하였고 저녁을 같이 먹은 후 워위크호텔(Warwick Hotel)이라는 부티크 호텔에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날 미국에서의 첫 아침이 마침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하여 식당을 찾아서 내려가니 사람들이 긴 줄로 서 있어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호텔 밖으로 나가서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호텔이 공원 근방의 외진 곳에 있어서 일요일 오전에 열린 식당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비토 카펠로 씨에게 도움을 청하니 다시 동부인 하고 달려와서 뷔페 브런치라는 것을 함께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같이 작업을 하였던 인연으로 휴스턴 체류 중에 내외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피츠버그의 걸프오일 본사에 들리셨던 이사님께서 본사 부사장인 프랭크 파일(Frank Pyle)을 대동하시고 휴스턴에 도착하시는 날, 워위크호텔 측에 어느 객실에 머무시게 되느냐고 문의하였더니, 1층 풀가에 있는 제 방 옆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호텔 객실의 등급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없었으나, 그러면 파일 부사장의 객실은 어디냐고 문의하였더니, 고층 어디라고 하기에 두 분이 같은 층에 머무는 것이 격에도 맞고 서로 편리할 것 같아서 인접한 객실로 변경하도록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프로토콜 면에서 저의 소질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사님이 휴스턴에 머무는 동안 어느 날 밤중에 국제전화를 거시다가 잠이 드셔서 호텔교환수가 비상사태로 알고 경비가 쇠사슬을 끊고 들어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당일에는 알지 못하였으나 이사께서 시차에 관계없이 불철주야 노력하신다는 사실에 감동하였습니다.

이사께서는 중요한 회사의 결정이 필요하실 때에는 실무 회사나 지역회시의 간부들을 통하여 설득하시는 일방, 본사의 고위 임원과 담판하여 결정을 얻고 필요한 결정이 지시로 내려오도록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피츠버그에 출행하시는 경우에는 회사에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였습니다.

걸프오일의 여러 동료 및 친지 중에서도 파크먼 클랜시(P. H. Clancyㆍ세계 원유조정책 / 후일 수석 부사장) 씨는 특별히 인간 전민제의 이상을 이해하고 지원하여 준 친구이자 후원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가 훗날 여려 대형 화학회사와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갈 때 격에 어울리지 않게 각 회사의 최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인간관계를 갖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부분적으로 성고가 있었던 것은 일찍이 이사님에게서 얻는 학습효과의 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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