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영원한 보스, 영원한 스승_3 (7)
  제8장[부록] 후배들의 회고담

1965년 - 실의의 짧은 울산생활

3월 말에 저는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갓 졸업한 신부를 맞이하며 울산에서 고기엽 씨 댁 바깥채에 둥지를 틀고 신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사택이 준비되기 이전이었습니다. 당시의 유공 사원은 신랑감 후보 명단의 상단에 올라 있었으며 중매를 통하여 여러 번의 서울 방문 끝에 결정한 인연이었습니다.

앞으로 10년간 울산 생활을 함께 하고 공장에서 능력과 경험을 갖춘 기술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가도록 하자는 장기계획을 가지고 회사와 사업에 관하여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신부를 설득하였습니다.

제가 가졌던 마음의 준비와 계획에도 불구하고 저는 공장생활에서 몇 번의 크고 작은 실의를 겪었습니다. 문화와 언어차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반미(反美)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들이 들려오고, 교대 근무가 아닌 주간 근무나 공장 운전이 아닌 다른 업무로 공장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었지 않았느냐는 아쉬움, 노조결성을 주도하였다는 이력과 유난히도 저의 교대근무 중에 자주 발생하였던 운전상의 문제를 보는 이상한 눈과 뒷말들, 재가동 중 운전공의 연료가스 밸브작동 착오로 가열기에 폭발이 일어난 대형사고(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음), 제 허락 하에 기계공이 양동이에 담아간 용제가 보수작업장에서 작업 도중 인화하여 발생한 화재 사고 등.

특히 용제인화 사고에는 저의 책임을 물어 당사자의 해명도 없는 가운데 공장징계위원회에서 1개월의 무보수 정직처분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직기간을 서울에서 보내고 공장에 복직하여 출근할 때 겪어야 했던 비참한 실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회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던 저에게 어려움만 많았던 공장 생활을 떠나 서울 본사로 옮기도록 기회를 주시고 구제의 손길을 뻗어 주신 분이 바로 이사님이었습니다. 10년 예정이었던 울산생활이 4개월로 단축되어 좋아했던 사람은 저의 신부였습니다.
 
▲ 울산 정유공장 정문 입구에 세워진 긴며 아치. 갓 쓴 촌로 두 분이 준공을 맞는 현대적 정유공장과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본사 기술부 공정과 - 너무 멀리 계신 이사님

1965년 7월부터 본사 기술부 공정과 공정엔지니어로서의 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직속 상관은 성정자 과장, 나준국 부장, 전민제 이사의 선이었으며, 같은 과 동료로는 운진만, 김철희 씨 등이 생각납니다. 여성 상사의 치마 밑에서 일한다고 짓궂은 기술부 건설과 동료들의 놀림이 있었으나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기술지원 업무를 소행하면서 회사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업무 훈련과정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기술지원 업무 이외에 저에게 주어진 큰 업무는 원유의 구매, 수송을 포함한 공장의 운영평가였습니다. 활용할 수 있는 자료도 구할 수 없었고 공장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수행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작업이 늦어지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이사님의 독촉과 질타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결국은 통계자료의 집합으로 끝을 맺어야 했습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불행하게도 이사님의 기대에 미치지도 못하고 성능 미달의 성과를 겨우 맞추어 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시하신 과제를 완결하지 못한 채 친구를 위한 송별 때문에 비행장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작업 중이던 자료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오니 난리가 난 것이었습니다. 이사께서 작업결과를 기다리시다가 보고가 없으므로 제 책상으로 찾아오셨는데 사람은 없고 책상 위도 깨끗해서 서랍을 열어 보셨던 바 지시하신 일은 끝은 맺지 않은 채로 있고, 사무실 서랍에서 트럼프 카드를 발견하신 것이었습니다.

곧 사무실로 찾아뵙고 질책을 받았는데, 나름대로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제가 심한 꾸지람을 스승님이나 어른으로부터 받아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정말로 깊이 자책했습니다. 신교동 자택으로 찾아뵙고 용서를 빌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공장에서 생활할 때에는 퇴근 후에 독신자 숙소에 모여 동료끼리 포커게임을 종종 즐겼습니다. 서울로 자리를 옯기니 기술부 건설과 동료들을 중심으로 퇴근 후에는 포커게임을, 낮에는 점심시간의 짬을 이용하여 브리지게임을 즐기는데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은종, 민석홍, 강태영 씨 등 건설과 동료들은 일에도 열심이고 결과물의 생산도 일류였던 쟁쟁한 엔지니어들이었으나 카드놀이 또한 즐겼습니다.

이사께서는 이러한 정보도 알고 계셨고,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행태를 아주 싫어하셔서 경고 차원의 조치도 취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지시한 과제도 종결 짓지 못한 채 제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버젓이 카드가 나왔으니 이사님께서 진노하셨을 것은 불문가지였습니다.

회사 동료 중에는 일부 악동 기질을 가진 친구들도 있어서 이사님을 양파에 비유하였습니다. 한 껍질, 또 한 껍질을 계속 벗기고 들어가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젊은 객기로 좋지 않은 뜻으로 하는 비판이었겠으나 후일에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이사님의 높으신 지식과 깊으신 뜻을 ‘헛똑똑이’들로서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불가능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또 결재서류를 보류하시거나 반려하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에 수정을 하여 올리는 대신 같은 서류를 다시 올려 결재를 얻었노라 하는 영웅담을 가끔 듣곤 하였으나 이 또한 지금 생각하여 보면 모르시고 결재하여 주신 것이 아니고 점수를 매기시며  하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사깨서는 저에게 구체적인 지침 대신 개괄적인 지침을 주시며 작업을 지시하는 경우가 있으셨습니다. 이는 저의 사고를 제약하시는 대신 융통성과 창의성 있는 사고를 유도하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오히려 고맙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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