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영원한 보스, 영원한 스승_2 (6)
  제8장[부록] 후배들의 회고담

성공적 외자도입과 해외기술훈련

정유공장의 건설이 진행되는 가운데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국제적 석유 대기업 집단에 의한 참여의 필요가 대두되었습니다. 우리 정부와 회사는 미국의 걸프오일을 합작 투자선(25% 지분)으로 선정하여 주식투자, 차관공여, 원유공급 등 9개의 중요한 계약을 숨가쁘게 협상하고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사께서 위원장으로 관장하신 외자도입교섭위원회가 전사적으로 구성되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걸프오일과의 기술원조협약에 따라 일차적으로 저희들(이선종 지도자, 김대기, 문동민, 박종률, 이기용)은 1963년 7월부터 필리핀의 필리핀 석유회사의 로사리오 카비테 정유공장에서 정유공정 기술 및 공장운영에 관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첫 해외여행과 국내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한 화학공학도(아직 기술자라고 부르기에도 미숙)에게 주어지는 첫 정유관련 기술훈련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즐거움과 기대가 너무 큰 나머지 해외훈련에 선발하여 주신 이사께 대한 고마움도 잠깐, 외자도입의 내용이나 앞으로 회사에 미칠 결과, 그리고 단기로 분투하시는 이사께서 겪으실 어려움과 외로움에 대하여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채 저희는 떠날 준비에 바빴습니다.

서울에서 필리핀의 마닐라에 이르는 여정은 2박 3일이나 걸렸습니다. 동경에서 걸프오일 사무실을 방문하여 근무일당(1일당 미화 40달러)을 지급 받고 1박, 다음 날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경유를 위해 다시 1박하였습니다.

동경에서는 힐튼호텔에 머물며 걸프오일의 접대를 받았고, 타이베이에서는 CPC 간부들로부터 사천요리를 대접받았는데, 그 종류의 다양함과 맛은 처음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샤오싱주(선흥酒)와 중국식 주도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CPC측에서 어떤 분들이 나오셨는지 기억은 없으나 정유산업의 경험자와 선배로서 신참인 우리를 성심을 다하여 격려하고 축복하여 주었던 것이 인상적이었고, 어떤 분께서 “민제는 잘 계신가?” 하시며 안부를 물으셨는데, 이름을 부르는 호칭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으나, 우리의 빅보스이신 이사께서는 이미 CPC에서도 잘 알려지신 인사이심을 알게 하였습니다.

1964년 - 울산 정유공장 생활, 배우며 일하며

필오일에서의 훈련과 마닐라에서의 생활은 앞으로 감당하여야 할 울산에서의 삶의 연장선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후, 먹을거리, 환경(특히 안전)의 변화를 견디며 40km 거리의 마닐라 - 로자리오 카비테 간을 출퇴근 하면서 교대근무를 자원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겨우 3개월 여의 훈련 후에 귀국하여 울산 정유공장에 배치되면서 저는 많지 않은 지식을 바탕으로 공장 윤전 요원들을 교육하는 임무도 맡았습니다.

▲ 1964년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 준공식 광경 [출처 ; SK이노베이션]

이후 곧 공장 가동준비에 투입되었고, 2조 2교대 1일 12시간의 연속 근무로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받으면서도 몇 달을 잘도 버티어 냈습니다. 5월에 있은 준공식까지 우리, 회사, 국가가 처음으로 이룩하는 많은 역사적이고 의미 있는 기록들을 만들어가며 보람을 느꼈으나 일에 함몰된 저를 포함한 공장 운전 요원들은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준공식에는 회사 사장과 이사 등 최고 경영층뿐만 아니라 경영층도 참석하시어 우리가 일체가 되어 성취한 정유공장의 성공적인 건설, 시운전, 정상가동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를 실감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걸프오일에 의항 공장경영과 불협화음

울산정유공장은 걸프오일과의 기술원조협약에 따라 걸프오일이 파견한 미국인의 경영, 운영 하에 있었습니다. 공장장이 이사께 보고 드리면서 이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각 부장은 공장장에게 보고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조업감독의 한 사람인 저의 직속상관은 생산과장 글랜 링글(Glenn Lingle), 생산부장 짐 베스트(Jim Best), 공장장 빌 핀리(Bill Pinley)였습니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담당자들은 미국 텍사스 주의 포트 아서 정유공장에서 데려온 경험 많고 나이도 듬직한 인사들이었으며, 경험이 없는 우리들과 어울려 일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분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텍사스식 미국 영어로 알아듣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망할 놈의(god damn)'이라는 욕을 ’이 망 할 놈의 발브(this god damn valve)라는 식으로 수시로 사용하였습니다.

인상적인 습관은 강한 블랙커피를 마시고 공장이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씹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자주 검은 침을 여기저기 뱉어대는 것 등이었습니다. 일에 열심이었던 점에는 감동할 만한 인사들이었지만 우리 ‘문화적’ 수준에 맞는 동료는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하였던 교육 내용 중에는 ‘미국 텍사스에서 온 공장 운전공들과 같이 일하며 생활하기’가 포함되어야 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하여 봅니다.   

1964년 4월 이후 공장의 운전이 정상궤도에 올라가면서 직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결성이 논의 되었습니다. 노조의 선(善)기능 만을 생각한 저는 노조결성의 지원을 요청받고 평의원이 될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5월 노조의 출범은 순조로웠으며 위원장과 부위원장 한 사람이 저의 교대조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원했건 원치 않았던 간에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이 우리나라 노조 결성의 선구자적인 사업장이 되었습니다만, 순수와 진정만으로 일을 추진하고 결정해도 된다고 믿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공장의 어떠한 직급이나 직책은 노조에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지도 몰랐고 걸프오일의 경영진이 노동조합에 비우호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이사님께서 “그 놈, 미친 놈 아니야!” 하면서 화를 내셨다는 서울로부터 온 전언에 움찔하였습니다.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조용하였지만 미국 측 주주인 걸프오일에서는 피츠버그 회사본부까지 민감하게 반응한 중대한 사안이었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사님께서 ‘놈’이라는 용어를 정말로 쓰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화가 나시고 실망하신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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