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방송된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은 한반도에 놀라움과 감격과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지금까지 심신을 죄어오던 전쟁의 압박에서 풀려난 해방감과 안도감은 더 없이 반가운 것이었다. 이제는 남의 종살이가 아니라 나름대로 생을, 기를 펴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좋은 일도 있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어서 해방이 된 우리나라는 몹시 어지럽고 소란스러웠다. 우선 좌익과 우익이 서로 맹렬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우익에서는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장덕수(張德秀), 조병옥(趙炳玉), 윤보선(尹潽善) 씨 등이 발기하여 한국민주당이 설립되었고, 좌익에서는 여운형(呂運亨) 씨가 주축이 되어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상하이에서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귀국하였고, 상하이(上海)에서 김구(金九) 씨를 위시하여 임시정부 사람들이 속속 돌아왔다. 오랜 해외 망명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나라를 세울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좌익에서는 박헌영(朴憲永) 씨가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 후 공산주의자들을 건국준비위원회에 침투시켜 주도권을 장악하게 하고 자신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 칭하면서 정부로 행세하게 하려고 했다.
미국, 영국, 소련은 일본의 항복 이후 한반도의 처리를 위해 외상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 뒤,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미소(美蘇)공동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설치되기는 했으나 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결렬되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민중들은 식민지 신세를 벗어나자마자 신탁통치를 당할 것이라는 소식에 격앙했다. 방방곡곡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연일 반대 시가 행진이 벌어졌다. 좌익에서는 처음에는 우익과 함께 반대했으나 이 제안이 소련 측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돌연히 찬성하기 시작하여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좌익 인사들은 소련을 종주국으로 받들고 그들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세였다.
남북합작의 정부수립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보수세력은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 군정청에서는 여운형, 김규식(金奎植) 씨를 내세워 좌우합작운동을 추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민심이 소란한 가운데 파업이 만연하여 생산이 감소되고 실업자가 속출하고 물가가 뛰고 경제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산업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에는 좌익세력의 선동이 크게 작용했으나 대중들은 그것을 미군정 탓으로 돌려 시위는 점점 더 심해졌다.
군정청에서는 이런 상황을 보고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공산주의를 불법화 시켰다. 일체의 좌익단체의 존재와 활동이 불법화 된 것이다. 좌익 인사들이 지하로 숨고 이강국(李康國), 박헌영, 이승엽(李承燁), 임화(林和) 같은 거물급이 모두 북으로 잠행했다. 월북한 그들은 얼마동안 요직에 올라 활동하는 듯 했으나, 결극 1953년에 억울한 혐의로 처형되고 말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을 도모하고 반국가적 간첩활동과 테러를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북노당은 남노당 요원들을 모두 숙청하여 권력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47년에는 그때까지 여러 차례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적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그 결과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고, 이어 유엔의 결의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인정되었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해서 1948년 8월에 탄생했다. 정부수립은 그 직전에 일어났던 <제주도 4.3사건>, <여수, 순천사건> 등을 진압하면서 어렵게 이뤄진 일이었다.
나는 이런 와중에 연구소를 유지하기 위하여 애써야 했다. 우선 종합과학연구소라는 이름은 종합과학주식회사로 바꾸고 조직을 개편했다. 종합과학이라는 낱말을 고집한 이 이름은 나의 지속적인 집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는 화학공업이 없다시피 했고, 또 공업에 사용할 수 있는 원료도 거의 없었다. 나는 당시 북삼화학(北三化學)에서 카바이드를 만들고 있는 사실에 착안했다. 이 카바이드를 원료로 아세틸렌을 만들고, 그 아세틸렌에서 빙초산을 하루 1톤씩 생산하는 공장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이 공장은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최첨단을 가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카바이드에 물을 부어 아세틸렌가스를 발생시킨 뒤 15%의 황산과 산화수은(酸化水銀)을 촉매로 하여 물의 1분자를 아세틸렌 1분자와 결합시켜 아세탈데하이드(acetaldehyde)를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이 아세탈데하이드를 정제, 산화시켜 0.1%의 초산 세륨(cerium acetate)과 1%의 초산 망간(manganeseacetate)을 촉매로 1분자의 산소를 결합시켜 빙초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0.1%의 세룸을 사용한 것은 과초산(醋醋酸) 축적을 막아 폭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루 순도 99%의 빙초산을 1톤씩 생산하면 그때까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빙초산을 국내에서 공급할 수 있고, 수출까지도 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또 일이 순조로우면 빙초산을 사용하여 무수초산(無水醋酸), 초산섬유소(醋酸纖維素)와 초산인견(醋酸人絹)의 합성도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것은 큰 국가적 사업이 될 전망이 있었다.
여기에는 2.600만원의 자금이 필요했다. 내게 그런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빙초산 합성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큰일인가를 인식한 이태규(李泰圭) 박사, 안동혁(安東赫) 박사, 김동일(金東一) 박사, 조광하(趙廣河) 박사,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柳漢相) 씨 등이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그 분들의 소개로 나는 상호은행의 전무로 있던 김유택(金裕澤)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상호은행은 경영난에 빠져 있어 정부가 한국은행의 김유택 씨를 상호은행으로 파견하여 대리 운영을 하게 하고 있었다. 김유택 씨는 내 계획 이야기를 듣고 선선히 융자를 주선해주었다. 상호은행에는 김유택 씨 외에도 이호상 씨가 업무부장, 황주룡 씨가 지배인으로 있었다. 아무리 첨단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공정이라지만 일개 무명 청년이 계획하는 가능성만을 보고 사심 없이 도와주신 그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공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부지 마련으로부터 시작해서 공장 건물을 짓고 기계를 만들어 설치해야 했다. 기계에 사용할 철재도 제대로 없는 시대였다. 또 야금(冶金) 기술이 미숙하던 때라 내산합금(耐酸合金)을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그 때문에 시설을 갖추는 데만 1년 이상이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공장이 완성되어 드디어 시운전의 날이 왔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시운전을 시작하려는데 촉매이송 탱크의 밸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탱크가 폭발했다. 산을 사용하는 공정이므로 탱크에는 납과 경연(硬鉛. lead와 bismuth)의 합금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것은 강도가 약하여 밸브의 손잡이 부분에 달리 촉이 부러져서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지켜보기 위해 바로 그 앞에 서 있던 나는 황산과 수은을 포함한 끓는 촉매와 함께 터져 나오는 뜨거운 증기를 하반신에 뒤집어서 중화상을 입었다. 시운전 의식은 참담하게 중단되고 말았다. 구급차도 없고 택시도 여의치 않는 시대였다. 화상을 입은 우리는 화상 부위가 옷에 들러붙지 않게 하기 위해 하반신을 벗은 채로 행렬을 지어 숭인동으로부터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학 병원까지 걸어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반라(半裸)의 행렬이 얼마나 기괴했을까, 여겨지지만 우리는 남의 눈을 의식할 겨를도 정신도 없이 병원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1개월 동안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한 끝에 거동이 가능해지자 나는 다시 공장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공장은 이번에는 탈 없이 돌아가 하루 1톤씩 빙초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북한이 대남 전력공급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남한은 졸지에 심각한 전력부족을 겪게 되었고, 공장은 빙초산 원료인 카바이드를 생산할 수 없어 휴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력부족은 산업계뿐만 아니라 시민의 생활에도 큰 불편을 가져왔다. 낮에는 물론 어두워져서 전기불이 필요할 때가 되면 잠깐 들어왔던 전기가 어김없이 나가버리곤 했다. 그래서 집집마다 등잔불을 사용하고 다리미도 숯불 다리미를 써야 했다. 등잔은 불빛이 어두울 뿐 아니라 석유를 부어 넣어야 하고 성냥을 켜대야 하고 유리로 된 것을 매일 닦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빙초산 공장을 시작할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일념에서 사원을 뽑는데 엄격한 입사시험을 실시했다. 당시 이력서는 사람들이 허위 사항을 예사로 적어 넣기 때문에 도무지 신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 등 4단계로 시험을 치게 했다.
수험자 중에 모든 시험에 1등을 하는 이가 있었다. 알아보았더니 동경제대 응용화학과를 나오고 함흥의 화학공장에서 일하다 해방 후 3.8선을 넘어온 이근무라는 사람이었다. 빈손으로 남으로 내려와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이다. 그는 얼마동안 우리 공장에서 일을 하다 공장이 휴업에 들어가게 되자 병기창으로 옯겨 갔으나 나중에 이북간첩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껴 그를 옥살이에서 구해준 것은 김동일 박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