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편_3

각기 일가를 이룬 자식들

현재 사남매는 나름대로의 생을 영위해나가고 있다. 수현이는 시카고대학 시절에 만난 미국인 리챠드 생크와 결혼하여 현재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살고 있다. 금술이 유난히 좋은데 아기가 없어 니나라는 예쁜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 니나는 벌써 11세가 되었다.

미시간대학에서 경제지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학에서 다시 경영학 박사를 한 뒤, 수현이는 교수직을 가졌었으나 교직이 맞지 않는다며 그만둔 뒤 현재는 회사 중역을 하고 있다. 리챠드도 회사 중역으로 있으며,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다.

수용이는 시카고대학에 다니던 이수억(李壽檍)과 결혼했다. 이수억은 호걸 기질이 있어 친구를 좋아하여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면서 남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SBS국장과 아서앤더슨코리아(Arthur Andersen Korea)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나, 불행히도 암에 걸려 60세에 별세했다. 수용이는 미시간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경희대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화여대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미는 신창무(申昶武)와 결혼하여 아들 준우를 두었으나 불행히도 준우는 10세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리하면서도 순진했던 준우는 양가 어른들에게 무한한 기쁨을 안겨다 주는 보배 같은 존재였다. 준우가 간 뒤 밝기만 하던 송미의 얼굴에 일말의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성품이 선량한 신 서방은 현재 기업체의 부사장이다.

성빈이는 위치타대학에서 알게 된 레이첼 크레인과 결혼하여 현재 5세가 되는 딸 마야를 슬하에 두고 있다. 레이첼은 위치타대학의 도서관학과 교수이고, 성빈이는 낚시용구를 다루는 상점의 주인이다. 마야는 똑똑하여 그 고장의 사립 프리스쿨에 다니고 있다.

준법정신에 투철한 사람

아이들 이야기는 이쯤 하고 남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는 준법정신에 투철한 사람이다. 경기중학 시절의 에피소드가 상징적이다. 당시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교문 밖의 빵집이나 호떡집에 나갈 때에는 담임선생 허가를 받고 나가라는 규율이 있었다. 남들은 그런 규칙을 무시했으나, 남편은 꼬박 선생님의 허가서를 받아가지고 나가곤 했다. 어느 날 호떡집에 선생님이 들이닥쳤을 때 다른 학생들은 도망가기에 바빴으나 그는 유유히 허가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남편이 경영하던 전엔지니어링이 한참 잘 나가고 있을 때 신문에 최고 납세기업 명단이 공개되었다. 놀랍게도 전엔지니어링이 톱10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삼성도, 현대도, 대우도, 럭키도 효성도 다 제치고 남편의 회사가 들어간 것이다. 아무리 잘 나가던 때라 해도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 명예는 곧이곧대로 에누리 없이 수익을 신고하고 세금을 낸 결과였다.

유공시절에는 정부의 주요 산업인 유공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삼엄하여 유공의 간부들은 정보부의 조사를 받는 일이 빈번했다. 그도 정보부의 조사를 두 번이나 받게 되었을 때 그의 준법정신이 그를 살려주었다고 하겠다. 무섭기로 이름 난 정보부원들도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이렇다 할 배경도 재산도 없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남편은 정직이야말로 무서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임을 경험으로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상주의자다. 정유산업 자체가 황당해보이던 시기에 그 일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정유산업을 꿈꾼 것은 개인의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차원에서 였다. 일전 한 푼 못 받는 조선석유 관리인 직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그의 머리에는 오직 한국 산업화의 그림만이 새겨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꿈을 꾸고 있을 땐 가족의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끼니가 어디서 나오는지, 하는 현실적 문제를 완전 일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은 가족으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나의 친정 아버지는 사업을 거두시고 들어앉으신지 오래였고, 내가 대학에 나가기는 했으나, 그 월급이라는 것이 일가의 생활을 꾸려나가기엔 너무나 약소했다.

어머니들

친정 어머니는 내가 교직을 갖게 되자 자연스럽게 우리 내외와 함께 살면서 살림을 맡아 주셨다. 어머니는 살림뿐만 아니라 우리가 낳은 4남매를 모두 소리 없이 키워주셨다. 어머니의 육아법은 보통 할머니와 딜리 첨단적으로 위생적이고 합리적이고 모범적이어서 갓난아이 목욕시키기로부터 시작해서 우유 분량과 온도시간 맞추기, 기저귀관리, 운동시키기, 이유식 조절에 이르기까지 직업적인 간호사를 앞지르는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또 유명한 살림꾼이었다. 94세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계부를 꼬박 적으시고 한 푼의 낭비도 없이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셨다. 그래도 생활비가 없어지면 가지고 계시던 패물을 말없이 처분하여 충당하셨다. 옛날 만주에서 사실 때 장만하신 50여개가 넘는 보석알을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아낌없이 하나 둘 씩 팔아 살림에 보태셨다. 남편의 이상주의는 장모님의 도움으로 구김 없이 뻗어나갈 수 있었다고 하겠다.

▲ 경기도 여주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우리집 4대

원래 가졌던 물건을 버릴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남편은 신교동 집을 유난히 좋아한다. 그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말이 60년 동안에 몇 번 나왔으나 그때마다 반대한 것은 남편이었다. 지은 지 80년이 되는 집이라 그동안 여기저기 손을 대기는 했지만 집의 뼈대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덕이다. 내부를 뜯어고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자는 제안이 인테리어를 전공한 셋째 딸 송미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렇게 할 듯 하다가도 주저앉고 만 것도 남편이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평생 몸에 익은 그 집만큼 우리의 늙은 몸에 편안한 집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은 어머니의 헌신을 결코 보아 넘기지 않았다. 돈이 없을 때에는 시치미를 돈이 생기면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는 또 그런 돈 관리를 빈틈없이 해내셨다. 시어머니에게도 똑 같이 돈을 갖다 드렸으나 두 집의 경리 상황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났다.

친정 어머니와 남편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어떤 면으로는 나보다도 그는 어머니와 더 죽이 맞았다. 어머니는 무조건 큰 사위를 사랑하셨고, 남편은 유능한 살림꾼, 알뜰한 돈 관리자인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드리는 돈을 언제나 맡은 돈으로 생각하여 어떻게든 그것을 늘려주려고 노력하셨고, 남편은 그런 장모님의 배려를 고마워했다.

남편으로서는 처가살이, 나로서는 친정살이를 45년 동안 아무런 마찰 없이 서로 편안하게 할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밝은 헌신과 노력, 남편의 장모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덕이라고 하겠다. 남편은 자기 동생들뿐 아니라 나의 형제들, 희균(喜均), 상균(尙均), 정균(貞均)의 유학비도 대주었고, 그들이 결혼할 때까지 생활비 일부를 감당해주었다.

어머니는 아들 상균을 위해 자하문 밖에 집 한 채를 사줄 것을 남편에게 부탁했다. 어머니 명의로 있던 신교둥 집을 맏딸인 나에게 물려 줄 준비였다. 사위가 처가를 위해 해준 평생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신교동 집 명의를 내 앞으로 바꾸자고 제의하셨을 때, 남편은 한사코 사양했다. 어머니의 유일한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공증인을 세워 그 집을 우리에게 물려준다는 유서를 쓰셨다. 신교동 집에서 우리가 계속 살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