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균 | 아내, 이화여대 영문과 명예교수
결혼 60년
우리가 결혼한 지 올해 만 60년(2011년 현재)이다. 언제 그런 세월이 흘러갔나 싶다. 그 많은 시간을 보내놓고 결혼생활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허울 좋은 말이나 껍데기 다 벗겨버리고 맨 속에 남는 알맹이는 무얼 의미하는가. 개성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두 사람이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안 둘이 어느덧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많은 시간을 동반하는 일이기고 하다.
남편과의 혼담이 오갔을 때 나는 하버드 옌칭(Harvard Yenching Instirute) 스칼라십 신청용지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 용지에 기입하여 다른 서류와 함께 보내기만 하면 미국 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나를 추천해주신 분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요, 학무처장인 방용구(房溶九) 선생님이었다.
미국이 아니라도 나는 정서적 미숙아의 기미가 있어 언제나 결혼 같은 일엔 무관심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장녀인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며 장차 사회에 진출하기를 희망하고 계셨다.
그랬는데 중매인의 권을 이기지 못해 부모님이 그가 지은 빙초산 공장을 가보시고 난 다음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공과를 나오신 아버지는 첨단 기술을 동원한 빙초산 공장을 보고 그의 재능에 반하셨고, 어머니는 그를 직접 만나보고 그만 마음이 기울고 만 것이다.
부보님이 그렇게 돌아선 마당에 나는 더 거역할 힘이 없었다. 결국 그와 약혼까지는 하였으나, 미국 유학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나의 희망을 이해하고 약혼한 상태로 “미국에 갔다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남자로서 얼마나 관대한 생각이었는지 철없는 나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미국 유학은 연기되고 결혼은 앞당겨졌다. 결혼하고 석유공사를 시작할 때까지의 10년은 그에게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10년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이쪽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로서는 미안함을 덮는 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학문과 재능을 존중하는 사람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생각이나 버릇을 알게 되는 가운데 나는 그가 우선 학문에 대해 매우 관심이 깊다는 것, 재능을 존중한다는 것, 또 지적 능력에 있어서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주의를 끈 것은 성정자(成貞子) 씨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성정자 씨는 나의 경기여고 1년 후배인데, 처음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다가 3학년 때 일약 학년 수석이 되어 교내의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서 서울대 공대에 진학하여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여성이 공대에 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희대(稀代)의 재원(才媛)인데다 눈이 어글어글한 미인이었다.
남편은 대학원 시절에 그를 알게 되었다. 6.25 전쟁이 발생한 뒤 우리가 부산 동대신동에 집을 얻어 피난살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성정자 씨가 찾아왔다. 한복에 아기를 업고 있었다. 그는 건넌방에서 남편과 한참 이야기 하다 돌아갔다. 취직을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남편은 그를 대선양조에 소개하여 취직시켜 주었다.
환도 후 남편이 조선석유의 관리인이 되고 정부의 정유산업 추진정책이 태동하기 시작하자 그는 사무실을 차려 사원을 모아들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성정자 씨를 불러왔다. 그때 남편의 사무실은 작고 빈한했으나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일류였다.
성정자 씨는 그때 이래로 암으로 아깝게 작고할 때까지 남편의 둘도 없는 동지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 남녀 간에 있을 법한 어떤 인력이 작용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작용했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인력이랄까, 감정은 어떤 형식으로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의 여성성보다 엔지니어로서의 재질과 능력을 더 존중했다. 조선석유 시기부터 석유공사를 창립 운영하고 전엔지니어링, 신한기공, 이수화학을 세워 여의도에 사옥을 짓고, 사업을 육성해가는 30년 동안 성정자씨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남편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성정자 씨는 우수한 남자 셋을 한데 묶은 것보다 더 능력이 있는 엔지니어야.”
또 요새 와서는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성정자 씨를 전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돼.”
그만큼 그는 성정자 씨의 재능을 인정했고 아끼고 있었다. 성정자 씨가 남편 회사에 입사했을 무렵, 여성의 입지는 매우 허약한 것이었고, 세상의 인식도 지금보다 훨씬 못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남녀의 차이나 편견을 넘어서 오직 그의 재질을 평가했던 것이다.
미스터 뚜
남편은 또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나의 학문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는 내가 대학에 나가는 일을 적극 도와주었고, 결혼 전에 미국에 보내주겠다고 한 약속을 끝내 지켜주었다. 둘째 아이를 낳은 뒤 애 엄마가 1년이나 유학을 갔으니 그동안 아이나 어른이 겪은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송구하다. 그것은 남편의 아량과 친정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또 내가 이화여대에 계속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대립해야 했다. 그가 장남이기 때문에 시어머니는 나에게 시댁에 들어와 시집살이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편은 약혼 전 김활란(金活蘭) 선생과 한 약속과 나하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어머니의 요구를 물리쳐 주었다. 나의 커리어를 불효자식이 되어 온갖 비난의 화살의 방패가 된 것이다. 시어머니의 성격은 보통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에 그 분을 거역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남편이 덮어놓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도와준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 대립하면서도 장남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종시일관(終始一貫)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를 모두 외국에 유학 보내고 그 뒷받침을 했다. 경제적으로 유복해서 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진 빛을 갚느라 두고두고 고생도 많았으나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 일을 감당했다.
정유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때의 그는 완전히 ‘일의 화신’이었다. 신혼 때 병기행정본부의 일로 1년의 절반 이상을 일본에 가 있던 것은 이유도 아니었다. 석유공사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부터는 아예 1년 내내 그의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걸핏하면 외국 출장이고 국내에 있을 때에도 일주일에 서너번 씩 울산에 오고갔다. 또 어쩌다 서울에 있을 때엔 연일 술을 마시고 밤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시는 밤 12시면 통행이 금지되는데 그는 의례히 통금시간이 다 되어서야 대문 앞에 와서 문을 열라고 소리치곤 했다. 동네에서 미스터뚜(통금 사이렌 소리)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 무렵의 일이다.
곧이곧대로인 사람
일의 화신(化身)일 뿐 아니라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신념과 행동력을 갖춘 사람이다. 1950년대의 폐허 속에서도 산업의 재건과 발전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기술 인력을 육성하면서 자신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봉사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일관하여 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신앙에 가까운 생각은 우리나라 정유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낮은 가격의 원유를 수입하고 다른 나라들처럼 소비지 정제를 통하여서 경제적이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을 공급하여야만 국내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조개표(Shell)를 포함한 세계 석유 에너지 회사들이 석유제품을 수입하여 국내에 판매하였으며 6.25전쟁 이후에는 자신들이 설립한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Korea Oil Storage CompanyㆍKOSKO)를 통하여 공급하였다. 판매 가격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원조자금의 사정에 따라 공급의 영향을 받았다. 석유 메이저 회사들의 한국 석유 시장에 대한 영향과 지배가 뿌리 깊기 때문에 우리 정유공장을 건설하고 운영하려는 시도는 준비도 부족하였지만 시도에 머물러 버리기 일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