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에서는 1966년에 이미 나프타분해공장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의 결정이 지연되어 공장건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이 일을 유공에 맡기면 결과적으로 걸프오일에 먹히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사업을 하지 않을 수 없어 1969년 4월 12일에 건설계약이 성립되었다.
나는 처음에 연간(年間) 10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공장 계획안을 정부에 제안했다. 이 시설을 확보하면 나중에 필요할 때 분해로 한 대만 보충한다면 15만 톤의 에틸렌을 만들 수 있어 현실적인 수요증대와 경제성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공장은 1972년 10월 7일 완공되었고, 예상대로 분해로 1기를 추가하여 15만 톤 공장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유공은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다. 정부는 이익 배당금이 외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유류가격을 하향 조정하고 이익금을 줄이도록 조정하는 정책을 폈다. 이윤을 많이 내면 25%의 지분을 가진 걸프오일이 그것을 가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국회에서는 국영기업체가 이윤을 남길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국영기업체도 기업인 이상 이윤을 이익을 남기지 말란 법도 없고, 또 이익을 남기면 석유화학공업에 투자하여 키워 가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석유화학공업을 민간에게 맡길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기업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정부는 화학공업을 세분해서 할당해주었다. 그러나 민간기업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동시에 투자를 하고 사업을 일제히 시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종합화학회사가 우선 투자하고 공장을 가동시킨 다음 민간기업에게 하나씩 차례로 불하해 나기기로 결정되었다.
이 계획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원래 석유화학공업은 하나의 연관체계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나프타분해로부터 하위계열 공장까지 한 회사가 운영하고 종말가공 부분만 다른 회사에서 하게 하는 것이 경쟁력을 위해서도,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도 타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정부는 하나의 체계 하에 있어야 할 공장들을 모두 따로따로 떼어놓았기 때문에 많은 혼란과 곤란과 지체가 뒤따르게 되었다. 나일론의 원료인 카프로락탐(caprolactam)의 경우는 많은 회사가 서로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각 회사가 지분 참여하여 공동경영 하는 사례가 생겼다.
나프타분해공장과 하위계열 공장을 다른 회사가 운영하는 것은 본래 일본 모델인데,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모두 한 회사가 운영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삼성이나 현대 같은 회사에서는 나프타분해에서 하위계열까지 한 회사가 운영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러한 체제로 나갔다면 공연한 시간과 자금과 정력의 소모를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공의. 발족당시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었던 이성호 제독은 1966년에 임기가 만료되어 퇴임하고 박 대통령과 가까웠던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박원석(朴元錫) 장군이 2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장호근 부사장의 임기는 아직 남아 있었으나 걸프오일과의 계약에 따라 차기 부사장은 걸프오일 측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상공부방관이던 박충훈(朴忠勳) 씨는 나를 불러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 했다. “지금 이 단계에서 걸프오일 측 인사가 부사장으로 오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유공장을 설계하고 지은 당신이 그 자리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걸프오일이 부사장 자리를 한국에 넘기면 당신을 천거하겠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석유화학공업을 생각하며 나는 피츠버그로 날아갔다. 걸프오일은 내가 그 자리에 간다면 부사장 자리를 한국에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그동안에 사정은 달라져 있었다. 박충훈 씨가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천거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걸프오일 측에서 이야기가 다르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박충훈 씨가 미는 다른 사람은 다른 자리로 가고 장호근 씨가 2년을 더 유임함으로써 사태가 수습되었다. 내게 부사장 자리가 돌아온 것은 장호근 씨가 사임한 1968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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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년 걸프오일의 World Wide Crude Oil Coordinator인 Parkman Clancy와 함께 서울에서 / 당시 그는 여러가지 불확실한 한국의 상황 속에서 걸프오일로 하여금 유공에 500만달러 직접 투자 및 2,000만달러 상업차관 제공의 결정을 내리도록 책임 있는 역할을 해냈다. 후일 그와 나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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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단지가 생기면 여러 가지 공업이 일시에 육성될 것이었다. 석유를 원료로 생산되는 에틸렌(ethylene), 프로필렌(propylene), 부타다이엔(butadiene), 톨루엔(toluene), 자일렌(xylene), 오소-자일렌(ortho-xylene), 파라-자일렌(para-xylene), 사이클로핵세인(cyclohexane) 등의, 물질은 합성수지, 합성섬유, 합성고무, 인조피혁, 합성세제, 유기화학 약품용제 등의, 재료로서 자동차, 비행기, 가전제품, 의료기기, 신발, 건축자재, 가스관, 전기기기 등에 널리 사용할 수 있어 각 방면의 사업이 일시에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전후 연합군의 점령으로 일체의 석유정제공업이 금지 당했다가 1953년에 이르러 정유공장의 재개가 허락되었다. 그 후 일본도 석유화학공업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1958년에 미쓰이[三井] 석유화학이 에틸렌 연산 2만 톤의 나프타분해공장을 지었고, 1959년에는 미스비시[三菱]유화(油化)가 연산 2만 5,000톤, 일본석유화학이 연산 5만 2,000톤의 나프타분해공장을 각기 세워 가동하고 있었다.
또 이데미스흥산[出光興産]은 1957년에 이미 2만 배럴의 정유공장을 지은 바 있고, 그 후 걸프오일에서 차관을 들여다가 공장을 확장하여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데미쓰석유화학은 이데미쓰흥산에게서 100%의 출자를 얻어 연산 10만 톤 규모의 에틸렌공장을 지어 석유화학을 출범시킨 바 있었다.
나의 석유화학에 대한 꿈은 일본보다 먼저 혹은 같은 시기에 시작하여 일본에 뒤지지 않는 석유화학공업을 가져보자는 것이었다. 야심이 지나쳤는지는 모르나 여건만 갖춘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일의 실현과정에서 정치가 끼어들어 나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