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이 발족한 직후인 1962년 10월 17일 전 계약액의 10%에 해당하는 공사비를 1차로 플로어에 지불했다. 2차 지불은 1963년 1월 5일에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돈이 없어 지불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제기획원에서 외화사정 악화로 공사비를 지불할 수 없으니 이 사업을 외국 석유회사에 넘기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우리는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앞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1시간가량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경제기획원의 제안은 국영으로 일을 추진하자는 유공 측 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나는 유공의 책임 하에 차관을 들여와 자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맞섰다. 그러나 기획원 차관 차균희 씨는 에쏘(ESSOㆍ스탠더드오일 계열)가 인수할 의향이 있으니 그리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5년 동안의 준비와 2년 동안의 건설을 위한 각고의 노력으로 태어난 유공을 고스란히 외국회사에 넘겨주자는 제안이었다.
자연 논쟁은 치열했다. 오랜 공방 끝에 결국 유공의 책임 하에 차관을 얻어다가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외국회사는 25% 지분으로 참여시킨다는 결론이 나왔다. 즉 차관을 교섭해줄 테니, 외국석유회사에 이것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나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에쏘, 칼텍스, 쉘, 모빌, 걸프오일 등 5개 회사를 상대로 차관교섭을 벌이기로 결정되었다. 쉘은 처음부터 이 문제에 부정적이었고, 에쏘는 차관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원유 공급에는 관심을 보였다. 또 칼텍스는 미국에서 만나 이야기 하자고 했고, 걸프오일도 본사에서 에드워드(Ben Edwoard) 씨를 보내 미국에서 만나 협상하자고 제안해왔다. 나는 그 전에 클랜시(P. Clancy) 씨를 만났을 때, 차관에 대한 언질을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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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회사 야유회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나의 첫 비서 김미자 양(사진에서 오른쪽) /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출신으로, 아내 나영균 교수의 제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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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마침 나는 플로어의 공장 배치도 최종안을 승인하기 위해 12월 10일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는 길에 로스엔젤레스에 들러 칼텍스의 부사장을 만나 차관 이야기를 타진해보았다. 부사장은 원유 공급과 판매시설 투자에 한해서는 차관을 줄 수 있으나 공장건설을 위해서는 차관을 할 의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원유를 파는 일에 한해서만 도울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나는 피츠버그에 있는 걸프오일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클랜시 씨가 있었다. 그는 원유담당 부사장으로 사내에서 서열이 네 번째였다. 1957년 그가 원유판매 시장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김일환 상공부 장관과 코리아 하우스 만찬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는 그 사람이었다.
그는 넉넉한 인품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관대함과 통찰력을 동시에 지닌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그 후 그가 타계할 때까지 수십 년 간 그는 나의 선배이자 친구가 되었으며, 후에 그가 피츠버그에 자리 잡게 되었을 때는 가족들과 그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내가 과거 5년 동안 정유공장 건설을 뛰어다닌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사비 차관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걸프가 25%의 지분참여를 하고 2,000만 달러의 차관을 주겠다고 선선히 동의했다. 신기할 만큼 시원한 대답이었다. 일의 타당성과 본질만을 보고 이렇게 대담한 판단을 내리는 클랜시 씨는 지금까지 많이 보아온 사리사욕과 계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군상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의 넓은 이해심과 관대한 도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은혜였다. 그 덕에 건설비 문제가 해결되고 유공은 원안대로 국영회사로 존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0만 달러의 차관과 원유공급 계약이 우리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걸프오일에서는 한국에 27명의 기술자를 파견하여 일을 하게하며 그들이 사는 집을 짓는 비용은 자기들이 부담하겠다고 제안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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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대한석유공사와 Gulp Oil Corp의 합작투자계약 서명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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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공장부지 서남쪽 근방에는 외국인용 사택단지가 지어졌는데, 독립가구 10채와 독신자용 숙소 그리고 수영장과 볼링앨리 및 식당을 갖춘 클럽 하우스, 의무실, 생활용품 가게(관세 면세의 혜택이 주어짐)를 갖춘 낙원 같은 아름다운 단지가 들어섰다. 지금 그 자리에는 제2 나프타분해공장이 들어섰다.
이때의 계약에 의하면 유공의 경영권은 한국 측이 갖고 걸프는 3명의 임원과 1명의 감사를 파견하여 걸프의 임원은 고문 역할만 하고 보수는 걸프에서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또 차관의 조건은 미국의 관행보다 저렴한 연 4.5%로 제공하고, 원유공급은 일본 이데미츠[出光興産]가 사오는 값과 같은 가격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약조건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유리한 것이었다. 어떤 동경대학 교수는 이 계약서를 하나의 본보기로 하여 학생들에게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했을 정도였다.
걸프오일과 계약이 성립된 후 극동지구 책임자인 굿만(Herb Goodman) 씨가 동경에서 서울로 와 계약대로 경영권은 한국 측이 맡아 일을 진행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걸프오일과 협약계약 내용이나 회사의 지배구조의 의미 및 중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이성호 사장은 계약의 내용과 달리 운영권을 걸프오일 측에 주려고 했다. 이 사태는 다행히 클랜시 부사장이 개입하여 계약대로 할 것을 재확인하였다.
이런 일들이 업무수행에 불필요한 장애가 되고 미국인과 한국인 간의 관계를 껄끄럽게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