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 12일 모든 준비작업을 끝내고 드디어 기공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나의 가슴은 터질 듯 벅찼다. 평생을 품어오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다니는 나날이었으나, 우리나라가 살기위해 정유공장을 우리 손으로 짓는다는 긍지는 뿌듯했다.
대한석유공사 초대 임원은 1962년 8월 21일 정부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사장 이성호(李成浩), 부사장 장호근(張瑚根), 기술이사 전민제(全民濟), 업무이사 서인홍(徐寅洪), 감사 이상윤(李相潤) 씨였다. 이성호 씨는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직업군인이었고, 장호근 씨는 해군작창장을 역임한 해군장성 출신이었고, 서인홍 씨는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었으며, 이상윤 씨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금융인 출신이었다.
이 분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훌륭한 분들이었으나, 기업이나 생산 유통업무의 관리경험이 없고 더욱이 석유나 정유에 관한 기초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사 내에서 이 분들의 협조나 지원을 받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해결해야 할 업무는 많고 어떠한 결정을 얻어내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많았던 점이 아쉬웠다.
임원들의 무경험에서 오는 어려움에 못잖게 심각하였던 것은 유공의 인사권자인 이성호 제독이 주로 해군이나 해병대 출신 장교들을 회사의 부장이나 과장에 임명하였기 때문에 담당 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없었고, 상사의 임원들을 보좌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나 기술, 건설 부문의 전문가들과 필요한 업무상의 협의나 협조가 불가능한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회사의 조직이나 인사, 재무, 구매 업무 등의 장악에 더 열성적이었다. 건설업무에는 충주비료 출신의 김상철(金尙哲) 씨와 해군기술장교로 있던 민석홍(閔碩鴻) 씨가 투입되었다.
1962년 유공의 설립과 함께 나와 같이 일을 한 기술자들 중에 경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은 수였다. 그러나 이때 선발한 인재들은 정유산업에 처음 참여하면서도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큰 인재들이어서 후일 우리나라 정유산업, 석유화학산업 및 엔지니어링 사업에서 개척자적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초기 유공 엔지니어의 구성은 상공부 산하 정유공장 건설위원회에서 근무하였던 김광모, 나와 함께 전엔지니어링 및 조선석유주식회사에서 일해 온 성정자, 문인일, 이선종, 윤진만 그리고 대한석유공사 공개 채용에 의한 1기생 40명이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의 상당 수는 회사가 시행한 해외기술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많은 경우에 그들의 평생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현대식 대형 화학공장 건설에 경험이 있는 기능공이 거의 없었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가 이룩한 공사라야 벡텔(Bechtel)에 의한 2만 5000kw 규모의 발전기 4기를 가진 발전소, 충주비료와 나주비료, 문경시멘트공장이 전부였다. 그나마 이들 공사를 할 때 기능공은 물론 용접공까지 모두 외국에서 데려다 썼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일을 감당할 만한 기능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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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Jimmy Lee(사진 오른쪽, 후일 걸프오일 회장)와 Herb Googman(사진 중앙, 후일 걸프오일 Trading, COTCO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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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플로어는 국제수준보다 낮은 가격으로 공사를 맡은 관계로 외국인 기능공을 데려다 쓸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기능공 양성소를 현지에 두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훈련해가면서 일을 시켰다. 그래야만 예산을 초과하지 않고 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훈련 받은 사람들은 후일 정유공장 공무부의 중견 기능공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석유공사의 보수공사와 유지, 그리고 확장공사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플로어에는 주재 엔지니어로 김광모 씨가 나가 있었다. 플로어는 계약에 의해 12명의 유공사원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1년 동안 공장설계 과정을 교육시켰다. 이들 12명은 강태영, 김창규, 문인일, 송준, 오충선, 윤진만, 은윤석, 이정원, 최도현, 최홍린, 한건우, 홍승만 씨이다. 플로어의 경비로 훈련받은 그들은 돌아오자 곧 우리 공장 설계에 참여했다.
이선종, 김대기, 박종률, 이기용, 문동민 씨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공장조업 훈련을 받았고, 김종헌, 박철원 씨는 공장정비 훈련을 받았다. 또 김찬욱, 최종대, 조원천, 최명규, 전응상, 이상은 씨는 대만의 중국석유에서 현지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유공의 기술부와 설계부의 기둥이 되었던 그들은 후일 유공을 떠난 후에도 여러 회사 요직을 맡아 우리나라 정유, 석유화학 및 엔지니어링 산업에 계속 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유공업에 참여한다는 긍지가 대단했고, 일에 대한 열성은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입사시험에서 엉뚱한 이유로 떨어질 뻔한 사름들도 있었다. 입사시험은 아직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설비가 미비한 관계로 신광여고의 교사를 빌려 써야했다. 경쟁은 20대 1의 치열함을 보였다.
응시자 중에는 김선동 씨와 김철희 씨는 졸업예정자였으나, 당시 새로 제정된 학사고시를 치르기 전에 석유공사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격미달이라는 이유와 김선동 씨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김철희 씨는 여자라는 이유로 시험관들이 불합격으로 처리해 놓았다. 그러나 한두 달 지나면 자연히 해소될 졸업자격이나 키나 성별이 인간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나는 성적 위주로 그들을 합격시켰다. 그들은 유공에 있는 동안에도 또 유공을 떠난 다음에도 뛰어난 재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발전해나갔다.
정유공장 건설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공사가 지연되거나 자료의 통관수속이나 면세수속이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플로어 측의 항의와 공사비 추가요구가 빗발쳤다. 그들이 처음 설정했던 건설비를 무자비하게 깎았기 때문에 그 독촉은 더욱 요란했다.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하고 조정하기 위해 나는 거의 하루걸러 서울과 울산 사이를 왕래했다. 새벽 비행기로 부산으로 내려가 트럭이나 지프차로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를 3시간 달려 울산에 가서 일을 본 후 다시 부산으로 3시간 걸려 돌아와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오는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당시에는 부산-울산 간의 도로는 포장이 안 된 흙길이었다. 그런 일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내 자신이 감탄스럽다.
울산과 서울 사이를 뛰어다니는 한편 나는 설계를 승인하는 업무와 차관도입의 업무도 맡아보았다. 사내 일부 인사들이 나를 향한 눈길이 곱지 않았고, 플로어도 사사건건 나와 대립하려고 했다. 또 심계원(審計院ㆍ지금의 감사원)에서는 나의 울산 출장이 상식 이상으로 잦다고 하여 항공사 기록을 조사해가며 나의 뒷조사를 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든 나날이었으나, 나는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며 일에만 몰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