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당시 울산에 있었던 조선석유공사의 기존 시설 공장은 6.25전쟁이 나자 미군이 접수하여 유류 공급창으로 사용하고 100만평에 이르는 조선석유의 부지도 미 8군이 전용하느라 울타리를 쳐 일반 시민의 출입을 엄중 통제하고 있었다. 명색이 관리인인 나도 공장 안에 얼씬도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던 차에 나는 미군이 조선석유의 부지 일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그 부분의 소유권을 사들였다.
나는 조선석유의 관리인으로서 그 재산을 살 수 있는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정유산업의 공장부지로 사용할 뜻이 있어서, 그 땅을 나의 개인 명의로 사들였다. 그러나 한국석유(나는 이 회사의 상무이사로 있었다)를 설립하여 정유산업을 추진하던 남궁련 씨는 돈을 빌려주는 담보로 이 토지를 한국석유회사 명의로 바꾸어 놓았으며, 내게 돌아올 3.5%의 주도 그가 차지했다. 그런데 5.16 때 부정축재 혐의로 그의 재산이 몰수되면서 회사 재산도 몰수되었고, 결국 조선석유주식회사 부지의 일부는 정부재산으로 귀속되었다. 나는 토지소유보다는 정유산업 추진에 그 뜻이 있었으므로, 그 재산에 대해 개인적인 미련은 없었다.
미군은 일제강점기 일본정부가 원산으로부터 울산으로 옮겨온 상압증류 시설을 알코올 공장으로 전환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한국정부는 이 전환산업을 완성시키기 위해 ECA에 원조를 신청했으나 반응이 없자 1949년 약 2억 원의 정부보조금을 들여 공장완성 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공사가 완성되기 전에 6.25전쟁이 나자 이 계획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울산 정유공장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런 역사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 메이저 오일에 대한 염려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미국국제개발처(USAID) 측과 사전협의를 하고 있었다. USAID는 우리가 구한 자금으로 원유를 사다가 정유한다면 석유공급에 배당했던 원조자금을 다른 용도로 전용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당시 포스터 휠러(Foster Wheeler)의 동경지점장이며, 2차 대전 중 해군 소장이었던 설리반 제독을 동경에서 만났는데, 그는 나의 석유사업에 대한 소견을 듣고 자신의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동창이며 당시 USAID의 장으로 있는 이노스 커튼(Enos Curtin) 씨를 소개해주었으며, 그로부터 차관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정면에 나와 있는 메이저오일만 보아서는 절대 안 될 것 같았던 일도 넓은 미국 천지에서는 여기저기에 길이 있었던 것이다.
브리핑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최고회의는 정유공장 건설을 결의하고, 다음 달 9월부터 대한석유공사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일을 시작했다.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우선 정유공장건설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1961년 말에는 입찰요령서가 작성되고 1962년 초부터는 공장건설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건설을 담당하는 특수 법인체(후일의 대한석유공사)가 생기기 전인 과도적인 기관인 정유공장건설위원회가 상공부장관 휘하에 설립되었고, 나는 그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나 외에 위원으로는 상공부의 고석윤(高錫尹) 공업국장, 오원철(吳源哲) 화학과장이 있었고, 김광모(金光模) 씨가 간사 역을 맡았다.
위원회에서 하는 일은 외국인에 의한 기술용역계약 체결, 국내 실태조사, 특수법인 창립 사무, 원유구매자금 문제 연구와 대책 창구, 원유구매자금 획득을 위한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ㆍ미국대외원조처]과의 절충, 한미석유협정에 의한 석유법의 검토, 정유산업 운영에 대한 대비, 에너지원으로서의 석유 및 기타 원료의 비교조정, 석유제품에 대한 세제 검토, 디젤화 계획의 재검토, 석유에 관한 제반 기술재료 수집과 간행, 석유정책 확립 등이었다. 몸뚱이가 열이라도 모자랄 일의 분량이었지만, 나는 ‘드디어 우리나라에 정유공장이 선다’는 꿈같은 사실을 되새기며 밤낮을 안 가리고 뛰어다녔다.
정유공장 건설은 국제 입찰로 시공자를 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외국석유기술 전문회사에게 시장조사, 건립조건 검토, 제조공장 선정, 석유판매시설, 항만 및 지질조사를 하게 했다. 그 일을 위해 미국의 UOP[universal Oil Product] 선정되었고, 그들은 7만 5,000달러의 비용으로 기업 가능성을 조사하여 1962년 6월 14일 자로 완성된 보고서를 제출했다.
UOP는 이어 공장에 대한 기본설계계약에 의해 설계사의 건설비에 대한 예산서를 작성했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7개 업체를 선정하여 국제입찰에 부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일에는 정치적 개입이 있기 마련이다. 미국의 플로어(Flour Corp)라는 회사가 한국과 인연이 깊은 밴 플리트 장군을 통해 정유공장건설계획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자기들은 경험이 많아 단시일 내에 건설을 완성할 수 있다는 요지였다. 플로어가 제시한 건설비용은 2,8000만 달러였으며, 입찰을 거치지 않고 일을 맡기면 입찰 선정 과정에 필요한 5개월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플로어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시달을 위원회로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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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년 대한석유공사 시작 직후, 6.25당시 10군단장이었던 알몬드(E. Almond) 장군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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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만들어 놓았던 사양서(仕樣書)를 플로어에게 주고 조목조목 따져 비용을 명시하는 견적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플로어는 1962년 8월 17일 자로 최고가격보장 방식으로 1963년 말까지 공장건설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플로어 측에서 수석 부사장 마샬(Marshall)씨, 사장 디터(George Dieter) 씨, 프로젝트 매니저 멕케이(Bill McKey)씨가 협상의 자리에 나왔다.
공장 건설은 우리 측의 설계명세서에 의해 행하기로 하고 가격은 1,712만 달러로 결정되었다. 우리가 원래 예상했던 가격은 내자와 외자를 합하여 1,880만 달러였는데, 이보다 168만 달러가 적은 값이었고, 애초에 플로어가 제시했던 금액보다 1,088만 달러가 적은 금액이었다. 플로어로서는 펄펄 뛸 정도로 분했겠으나, 그들은 이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0월 13일 대한석유공사가 드디어 설립되었고, 플로어와의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완공기간은 1964년 4월 말로 하되, 기한보다 빨리 완공하면 상여금을 내고 기한보다 늦으면 벌금을 내는 조항을 넣어 공식 공사비를 책정했던 가격보다 한층 더 싼 1,599만 달러로 계약했다. 이것은 먼저 깎았던 1,712만 달러보다 113만 달러가 더 내려간 가격인데 이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1950년대부터 꾸준히 준비를 해온 덕으로 우리 측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우리 측에 유리하게 계약을 맺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플로어의 부사장 디터 씨는 영국 옥스퍼드를 나온 수재였으며, 나의 성의와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협상에 진 서운함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계약이 체결되었을 때의 축하연에서도 플로어의 사장이 나를 보는 눈은 곱지 않았고, 비꼬는 말을 연달아 던지곤 했다. 그러나 그들도 내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익을 위해서 한 일임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정유공장 후보지를 나름대로 물색하고, 울산, 부산, 여수, 인천 등 7곳을 선정해 여건을 조사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곳은 울산이었다. 울산부두에는 큰 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특수한 계루시설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울산만은 수심이 깊어 대형 유조선이 정박하기에 유리했으나, 당시 울산 부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코스코가 점유하고 있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공장을 짓게 되어도 코스코는 공장 부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선 그들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부분부터 사용하는 방식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코스코가 사용하고 있는 부두에다 계류시설을 만드는 대신 해안에서 1.9km 떨어진 바다 속에 부이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경제성을 위해서 10만톤이나 15만톤 규모의 유조선을 계류해야 하는데 바다 속 부이는 그 일을 너끈히 해 낼 수 있는 시설이었다.
이 시설을 만든 것은 이모드코 부이(IMODCO BUOY) 회사였다. 그들은 단수계류부이를 여러 곳에 설치한 실적이 있었다. 이것은 바다 한 가운데 하나씩 독립적인 계류점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돌핀(dolphin)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대규모 준설공사를 할 필요도 없고, 잔교를 만들 필요도 없어 설비비용을 적어도 170만 내지 200만 달러 정도 절약할 수 있었다. 또 부이는 간단해서 다른 선박의 통행에 지장을 주는 일도 없고 바다 밑을 깊이 팔 필요도 없기 시공이 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