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씨는 학벌도 좋고 온후한 인상이어서 과도기의 정국을 잘 이끌어 나가리라고 사람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자기와 가까운 민주당 구파를 두둔하여 편파적인 인사를 되풀이 하여 인심을 잃었고, 의원내각제라는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에도 공공연히 내각의 정책에 개입하여 부담을 주었다.
사회 혼란은 가중되고 물가는 치솟고 민생이 더욱 어려워졌다. 4.19 때와 또 다른 과격한 데모가 연일 일어나고 국가 안보가 불안해지고 지금까지 철통같았던 반공사상이 해이해지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정쟁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지 1년도 못 되어 얼어난 1961년의 5.16군사정변은 이러한 불안정한 정세가 초래한 결과였다.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이끄는 군사정권이 내세운 혁명의 목적은 ① 통일운동을 발전하는 급진적인 학생운동과 혁신계 활동의 봉쇄 ② 이승만 정권의 친미반공체제 계승, 유지 ③ 국가 주도 하의 계획경제를 통하여 자생적 한국자본주의의 재편이었다. 1963년 10월에 실시한 총선거를 통해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2년 7개월 동안 군정을 맡은 기관은 국가재건최고회의라 불렀다.
군사정부는 ‘국가 주도 하의 계획경제’를 확보하기 위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웠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기안된 직후인 1961년 8월에 나는 최고회의에 나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장유산업에 대한 브리핑을 하라는 것이었다.
브리핑은 최고위원 전원이 모인 전체회의실에서 있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정부를 대표하는 기구로서 현재 미국대사관 옆 건물, 그러니까 한때 경제기획원이 사용했고,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브리핑은 전적으로 정유공장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나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사실대로 이야기 하면서 정유공장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또 정유공장을 지을 경우 국영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민영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내가 국영을 주장한 이유는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2,000만 달러나 되는 자금을 민간이 부담하기 어려워 대부분을 정부 융자나 정부보증에 의한 차관, 정부 보유 달러의 대여 내지 불하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또 민영으로 할 경우 어떤 특정인에게 특혜를 주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많을 것이기도 했다. 또 사상 최초의 정유공장을 마땅히 나라의 사업으로 시작하는 것이 떳떳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시 화신산업(和信産業)의 박흥식(朴興植) 씨는 일제강점기 확보한 조선석유회사의 주를 1%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연고권을 내세워 정유공장을 세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외자를 얻어올 터이니 정부가 보증을 서고 이 사업을 자기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제네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대리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회사를 통해 실제로 걸프 측과 차관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그 시점에서 그가 2,5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오는데 성공했다면, 석유사업은 그의 것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박흥식 씨는 원산에 있는 조선석유에서 일하던 나윤호(羅允鎬) 씨와 함께 일할 생각이었다. 걸프에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기 위해 대만의 중국석유회사의 장광세(張光世) 씨를 보내 박흥식 씨를 만나게 했다. 나는 장광세 씨가 박흥식 씨와 회담을 마치고 김포 비행장에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상공부의 주선으로 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실은 두 번째의 만남이었다. 1956년 나는 외국의 정유공장 실태를 시찰하기 위해 대만의 중국석유(Chinese Petroleum Corporation)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부사장이던 장광세 씨를 만났단 것이다. 자리를 함께 했던 김개영(金開英) 사장, 호신남(胡新南) 공장장, 동세분(童世芬) 부공장장은 공장운영에 관한 그들의 경험담을 자세히 나에게 들려주었다. 김개영 사장은 여러 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는 한편, 세계석유사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자기네 중국석유가 걸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덧붙이면서 그 자리에 동석했던 걸프의 주재원 조니 월터즈(Johnny Walters)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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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년 Taiwan의 Taipei 및 Kaoshiung을 방문하여 중국석유공사(Chinese Petroleum Corporation, CPC) 임원들과 함께 / 사진 왼쪽에서 김개영(金開英), 호신남(胡新南), 나, Johnny Waters, 장광세(張光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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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영 사장은 중국 정유산업의 선구자로 2차대전 중에는 옥문(玉門)정유공장을 건설했고, 장제스(蔣介石)정부가 대만으로 옮긴 이후에는 가오슝에 있는 구(舊) 일본 해군연료창을 개수하여 석유공사를 만들어 산업의 기반을 닦아 오늘의 대만의 번영을 가져오는데 공헌한 사람이다.
장광세 부사장은 후일 대만 정부의 경제부장(우리나라의 경제기획원장관에 해당)을 역임했고, 호신남 공장장은 후에 중국석유화학공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들은 조언과 정신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대한석유공사가 발족하여 공장운영을 시작하자 우리 운전요원들을 가오슝으로 초청해 현장 훈련을 받게 알선해주기까지 했다.
걸프가 내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장광세 씨와 월터즈 씨를 통해서였고, 그로 인해 1958년 걸프의 원유 판매 담당 부사장 파크만 클랜시(Parkman Clancy) 씨가 극동지방에 대한 투자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나는 그를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상공부장관이던 김일환 씨는 클랜시 씨를 코리아 하우스에 초대하면서 나를 동석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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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은 CPC 임직원들은 Shrnghai 정유공장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나는 이들을 산업시찰에서 만난 이후부터 계속 교류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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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클랜시 씨는 대만에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국의 석유사업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지의 원유생산은 과잉상태여서 1배럴에 70센트인데도 판로를 찾아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걸프가 한국에 정유공장 건설을 적극 돕게 된 동기로 작용했다.
이런 점들을 모두 감안하면 성사는 되지 못했으나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정유산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지대했고, 나름대로의 준비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사정과 대외사정이 얽히고설킨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마련된 군사정부의 정유산업 브리핑 회의석상에서 나의 열띤 설명 후에 아무런 논평도 나오지 않았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 이하 최고회의 위원들이 즐비하게 앉은 앞에서 나는 정유산업의 필요와 전망과 그동안의 경위를 누누이 이야기했다. 다 이야기 하고 나서 후련하기도 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어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고회의는 나의 이야기를 헛되이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들 특유의 행동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일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으며, 나는 필요한 입법을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대한석유공사의 설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브리핑이 있기까지에는 장애도 많았다. 미국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회사에서는 조선석유공장을 자들에게 팔라는 교섭을 벌였다. 당당한 세도를 가진 스탠더드의 압력은 정부로서도 거역하기 힘든 일이었다. 경제기획원의 차균희(車均禧) 차관은 한국이 메이저 오일을 상대로 싸우면서 사업을 할 수 없다며 스탠더드오일의 말을 받아들여 100% 외자로 기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