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제주도여행 (118회)

항암치료가 없는 5월 25일에 새천년포럼 여의도 사무실 개소식을 가졌다. 강영훈 총리, 이어령 장관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며 그 이를 보고 환자 같지 안다며 놀라는 빛이었다. 새천년 포럼 개소식에서는 다행히 자기가 주최를 한 행사여서인지 정말 환자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을 평소와 같이 맞이하고 인사말도 잘 해냈다.

남들이 그이에게 아픈 분 같지 않고 건강하게 보인다고 인사말을 할 때마다 서울대 병원의 김노경 박사가 “1년 6개월입니다”라고 한 말이 내 귓등을 치고 갔다.

5월 26일 주미 대사로 양성철 박사가 임명되었다. 몇 달 전 이정빈 외통부 장관이 그이를 주미대사로 보내고 싶다는 김 대통령의 의사를 전해 주었고 그 후 입원 중 병문안 온 한광옥 비서실장을 통해서도 김 대통령의 의중을 말해준 바 있었다. 그러나 항암치료 중 그런 막중한 자리를 맡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좋은 기회도 잡지 못하는 처지가 원망스러웠지만 ‘남편 건강만 회복된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나’ 라는 생각으로 자위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마지막 제주도 가족여행

9월 6일부터 4박 5일간 우리 다섯 식구가 제주도에서 지냈다. 저녁이면 신라호텔과 하이야트 호텔을 잇는 오솔길을 따라 시원하고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시며 걸었다. 남편과 손잡고 걸으면서도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게 될까?”라는 방정맞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이는 힘들지만 가족을 위해 간신히 참으며 시간을 보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식사도 그런대로 잘 해서 마음은 놓였다. 마침 김선길 장관 내외도 내려와서 같이 식사도 하고 다음해 1월에 하와이에 골프나 치러 같이 가자고 했다. 그이도 좋다고 대답을 했으나 물론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다른 친구 부부들은 겨울이면 따뜻한 하와이로 골프여행을 연례행사로 하던데, 우리부부는 그런 호강도 한번 못해보고 그만 병이 난 것이다.

마지막 가족여행이 머리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그이가 떠나고 제일 먼저 간 곳이 제주도였다. 남들은 추억이 서린 곳을 의식적으로 피한다고 하지만, 나는 남편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서 같이 지낸 곳을 더 찾아가고 싶어진다.

그동안 팩스로 우리에게 많은 자료와 도움말을 주신 김의신 박사가 9월 22일에 한국을 방문했다. 김 박사와 주치의인 노재경 박사, 삼성의료원의 이제호 박사를 한 자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김 박사는 암 환자에게 꼭 같은 약을 투약해도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사망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것은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같은 암 환자라도 낙천적인 성격일 때 치료의 효과가 더 크고 비관적인 환자는 심리적으로 패배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치료의 효과가 그만큼 적어진다는 했다. 나는 그 말을 붙들고 싶었다. 낙천적인 남편의 성품이 혹시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면서 어떤 말을 들어도 나는 놓치지 않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 번째 RF와 인슐린 쇼크

한 달 넘도록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있다가 10월 12일 PET검사를 했다. 노 박사가 전화로 검사결과 2센치의 암세포가 나타났으니 입원해서 RF를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개복을 하지 않고 배위로 직접 고주파 열처리를 한다니 듣기만 해도 끔찍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본인의 실망은 오죽했을까? 열 번의 항암치료, 고주파 열처리 시술 등, 근 스물여섯번이나 이불과 식기와 음식 보따리를 쌌다 폈다 병원을 들락거렸는데 또 입원을 해야 하다니!

10월 17일 혈관촬영실 앞에서 근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하나님께 그이를 고쳐달라고, 살려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종태 박사가 나오면서 “의심쩍은 곳은 무차별로 쏘아대느라고 시간이 걸렸는데 박 장관님은 대단해요. 모두 못 참고 난리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버티셨어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내 가슴은 아려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라리 소리를 치고 난리를 치지... 남편이 가엾고 가여웠다.

잠시 후 침대위에 누워서 끌려나오는 그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가까이 뛰어가 보니 베게는 홍건히 젖었고 온몸이 물속에서 나온 듯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찢어지는 듯한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건으로 땀을 씻어주며 병실로 올라갔다.

▲ 건강하던 시절 방송 인터뷰를 하는 박정수 전 장관

조용히 눈을 감고 있기에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보통일이 아니더군”이라고 입을 열었다. 워낙 참을성이 많은 그이로서는 최대한으로 자기의 통증을 표현한 말이다. 그 후 가슴부분과 위 통증을 호소해서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혹시 맨 살 위로 구멍을 뚫고 간에 있는 암세포를 태울 때 위를 건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태섭이가 교회가기 전에 아침식사를 하러 오는 일요일이었다. 늘 하듯 그이는 그날도 서재로 인슐린을 맞기 위해 들어갔다. 그런데 나오면서 “또 알레르기 반응인데...”라는 것이다. 의사가 그전에 준 항히스타민 주사약을 든 채 그이가 허갑범 박사에게 전화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설탕물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이의 말이 얼버무려지면서 전화기가 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부엌에서 뛰어나와 4층의 산부인과 의사를 불렀다. 이 박사가 약병을 보더니 항히스타민이 아니라 혈압 상승제라고 하는 것이다. 혈압이 잘 안 잡힌다고 하며 노재경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혈압 상승제를 2분의 1 분량을 주사하고 급히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주사를 맞은 후 미리 불러놓은 119에 그이를 싣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위의 사건이 어떻게 빨리 진전이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정신이 없다. 그이는 쓰러져서 말도 못하고 늘어져 있었다. 그 전에도 한번 인슐린을 맞은 직후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간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두드러기가 온몸에 돋았다. 허갑범 박사는 그 날부터 인슐린 주사 대신에 먹는 약으로 대치시켰다.

세종연구소 이사장직

항암 치료가 다 끝난 지 한 달 후인 10월 25일 밤 10시 한광옥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직장을 가질 정도로 회복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세종연구소 이사장 자리가 공석이라는 것이다. 그이는 곧 노재경 박사에게 전화로 의논을 하자 그런 자리라면 ‘박 장관님 상태에서’ 맡을 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번 시도를 해보겠다고 연락을 했더니 나에게 “부인도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한 실장이 우리를 생각해주는 그 자체가 너무 고맙고 감동했다”고 하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이가 강영훈 이사장님에게 전화를 하니 임기가 끝난 것이 아니고 사정상 사표를 제출해서 공석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 후 반기문 차관과 정원식 전 총리가 연락을 맡아주었다. 결국 이사회 결의까지 끝났고 취임하러 가는 일만 남았을 때였다.

11월 13일 노재경, 이종태 박사가 우리를 불러서 갔다. 9일에 찍은 MRI에 의하면 RF도 쓸 수 없는 위치에 암세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에 가서 실험 약을 써보라는 것이다. 간 기능이 더 저하되기 전에 그리고 근력이 있을 때 치료를 받아 보라고 했다. 그동안 회복의 희망을 갖고 지내왔는데 기가 막혀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이가 정원식 전 총리께 연락을 했다. “취임하자마자 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철회 해야겠다”고 전했더니 정 총리께서 “그 자리는 2~ 3개월 비워도 괜찮은 자리니, 맡으면 오히려 심리적으로 도움이 될 것 아니냐”는 배려 깊은 말씀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의신 박사로부터 팩스가 왔는데 FDA 인가가 안 나온 실험 약은 적어도 6개월간의 치료 기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반기문 차관에게 도저히 취임할 처지가 못 된다며 후임에 정원식 전 총리를 추천했다고 한다. 11월 16일 마지막으로 한광옥 실장에게도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정원식 전 총리를 추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누구보다도 한광옥 실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끝까지 우리를 챙겨주고, 대통령께도 보고한 사항인데 취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입장이 곤란했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미안했다. 우리가 외식을 하고 있는 곳으로 최필립 대사가 전화를 했다. “모처럼 DJ가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소리냐? 이름은 걸어 놓고 다녀오라”고 설득했다.

발병 후 두 번이나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베푸시면, 그 행복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빨리 가버리곤 한다. 영특한 딸을 주셨는데 10년 만에 데리고 가셨고, 우리부부가 제일 자신 있는 외무장관직도 허락하신지 5개월 만에 박탈하셨으며, 주미 대사직과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은 눈앞에서 흔들며 보여만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 하시는 걸까? 이번만은 꼭 남편을 살려달라고 매일 매일 기도를 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