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총선 불출마 선언 (84회)

한편 청와대의 김기덕 공보비서관이 신문을 보았다며 실무진에 문의해본 결과 전국구 가능성이 있는 것 같으니 아직은 본인 입으로 야당에 간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실무 진들은 YS가 그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96년 1월 24일 윤성태 씨가 의료보험 협회장직을 사직하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이는 의젓하게 후배에게 선거 전략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유권자로부터 등 떠밀려 낙선하고 정계 은퇴하는 노정객과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허주에게 윤성태 전 보사부차관을 적극 천거한 만큼 자기의 전국구는 성사가 안 되어도 이 청은 들어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다른 당으로 갈 생각을 굳히지 않았었다.

96년 1월 27일 신한국당 당원 300여명이 참석한 김천 문화회관에서 15대 총선 불출마 결정을 공식 선언했다. 다음은 2월 1일자 김천신문의 보도 중 일부이다.

--- 박정수 위원장이 지역구 불출마 선언을 했다

「지난 13년 반 동안 4선 의원으로 만들어주고 국가와 지역을 위해 활동하게 한 지역민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했다. 이러한 결심을 하기까지 많은 고뇌를 하였다는 박정수 위원장은 불출마 동기는 지역민들이 아끼고 아쉬워할 때 지역구를 유능한 후배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것이 정치인의 올바른 도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라는 결론에 따른 것이니 순수한 뜻을 이해해줄 것을 당부했다.

국가발전과 안보를 위해 의원외교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아울러 지역발전과 지역구관리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는 박정수 위원장은 이제 영예로운 5선의 고지를 눈앞에 두고 또 한번 무리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다음은 같은 날 김천신문의 메아리 란에 실린 내용이다.

「박정수는 나라와 김천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심부름꾼이었다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다‘는 말로 끝맺음 한 박정수의원의 15대 총선 지역구 불출마 선언은 이를 지켜 본 당원뿐 아니라 지역민 모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연세 때문에 용기가 없어진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무슨 말을 하느냐, 지혜가 생긴 것일 뿐‘이라고 답변한 박 의원에게서 할 일이 많음에도 후배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그 지혜를 배울 수가 있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시 서슬이 시퍼렇던 백남억 의원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어 전 국민을 놀라게 한 박 의원이 전례를 깨고 4선 의원까지 되었으며 이제 영예로운 5선의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박정수 의원이 지역구 출마를 포기한 것은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의 대변자로서 국정에 충실했으며 특히 국가의 발전과 안보,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공로를 세웠다. 동시에 지역의 발전과 지역구 관리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은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

▲ 14대 국회에서 상임위 발언을 하는 박정수 의원.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과의 알력 끝에 15대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월 28일 강삼재 사무총장이 임인배 씨를 공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역인 자기에게 전혀 말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이 그이로 하여금 탈당과 동시에 야당으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같은 날 힐튼호텔에서 부부동반으로 JC와 김원길 의원과 같이 식사를 했지만 탈당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그이가 허주에게 전화로 윤성태 전 보사부차관을 공천하면 선거운동을 지원하지만 아니면 손 뗀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당 대표인 허주는 임인배 씨의 공천 결정도 모르고 “정해창 씨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끝까지 모른척하고 나를 소외시키면 다른 당으로 간다.” “정말 갈 수 있다니까…” 허주의 웃음소리가 곁에 있는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전화를 끊고 “허주가 설마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5년 가을부터 당적 변경문제를 놓고 노심초사하며 고민했지만 자기가 추천한 윤성태 씨를 공천하면 본인의 전국구 여부를 불문하고 당에 남아서 후임을 위해 선거운동까지 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이 무엇 하나 자기의사를 존중해주지 않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며칠 후 신한국당 후보 명단이 발표되었고 김천은 임인배 씨가 결정되었다. 신한국당에서는 민정계 당 대표보다도 민주계 사무총장이 실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아침 허주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으나 그이는 단순히 통보전화는 받지 않겠다고 해서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JC로부터 신촌 향원에서 DJ를 만나자는 뜻밖의 제의가 왔다. 원래는 2월 15일까지 미국방문을 마친 후에 탈당과 국민회의 입당문제를 마무리 지으려는 계획을 했는데 그쪽에서 앞당겨 연락이 온 것이다.

전혀 다른 정치노선을 걸어온 분이며 거의 접촉이 없던 분과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그날 집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면서 이태영 박사와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미국대사관 리셉션에서 만난 이태영 박사를 모시고 플라자호텔 일본식당에 갔다. 식사를 하면서 오래 오래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 DJ와의 관계에 대해서 “내가 서운했던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머리 좋은 DJ를 한번만 대통령자리에 앉혀보고 싶어요”라고 한 말씀을 잊을 수가 없었다.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옷도 벗기 전에 “어떤 분이냐”고 급히 물었다. “대화가 잘 되는 분 같았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날 주로 국가이익 차원에서 영입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IPU 집행위원에 걸 맞는 순번을 약속한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그의 야당행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1987년 대선 당시 허주가 우리 집에 전화를 수차례 하고 민정당 입당을 권유했을 때도 나는 시어머님, 아들, 친척들과 함께 교인인 YS의 민주당 입당을 희망했다. 그러나 그이는 혼자 민정당 입당을 단행했고 이번에도 처자나 가족의 의견이 아닌 본인의 의지로 국민회의 입당을 결행하게 된 것이다.

막연한 불안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1월 21일 아침뉴스에서는 민자당 전국구 예상자 명단에 그이 이름이 포함되어 TV화면에 남편의 얼굴이 크게 비쳐졌다고 한다. 언론인들 생각에 포함시킬 만한 인물을 계속 소개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