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직후 김의신 박사가 소개한 아산병원의 이정신 박사를 찾아갔다. 마이토마이신에 대해 이 박사는 독성이 강하기는 하나 아브르지즈 박사가 추천했다면 한번 맞아보자고 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왔기 때문에 3월 28일, 새천년 포럼 간담회를 갖기로 했다. 그이가 심혈을 기울여 설립해 놓고 2년 만에 참석하는 행사였다. 그동안에도 포럼 사무총장인 김영재 교수가 여러 번 행사를 주관해 왔는데 우리가 귀국하게 되자 첫 간담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 날 봉두완 의원 내외의 초청으로 서울클럽에서 점심을 먹고 행사장에 나갔다. 오랜만에 만나고 싶은 분들이 대거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인 김덕 전 정보부장이 “부시 방한 후의 남북관계”에 대한 유익한 발표를 해서 의 의있는 모임이 되었다. 남편은 머리카락이 한번 빠졌다가 다시 자라, 짧은 흰머리이지만 체중은 2000년 서울을 떠날 때보다 늘어서 겉보기는 환자 같지 않았다. 개회사에서의 유머도 여전했다.
4월 1일 아산병원에서 마이토마이신 15mg을 맞고 젤로다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 박사는 그이의 백혈구와 혈소판이 떨어졌다며 마이토마이신 대신에 CPT-11과 타시티아를 주사하기로 해놓고 치료 날짜를 자꾸 연기하는 것이었다. 우리보다 일찍 귀국해서 마이토마이신 치료를 받아온 진 변호사가 머리도 빠지고 골수도 파괴돼 조혈기능을 상실하여 피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그 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치료할 약이 없어 망막하기 짝이 없을 때 하이야트 호텔에서 우연히 김동건 아나운서를 만났다. 그이의 경기, 연세 후배여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정을 들은 김동건씨가 자기와 고교 동기이며 유명한 종양내과 의사인 김노경 박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며칠 후 고맙게도 김동건 씨가 직접 우리를 데리고 김 박사 연구실로 갔다. 미국에서 찍은 CT사진과 5월 암센터에서 찍은 사진을 대조해보더니 이진수 박사와 같은 이야기었다. 암 세포가 자라는 속도가 빠르니 빨리 손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이는 그 자리에서 “김 박사에게 나를 맡기겠다”고 하고 그 날 입원수속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귀국 후 5월 17일부터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맞았던 주사약을 배합해서 맞는 치료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김 박사 말에 의하면 국제암학회에서 발표한 논문 가운데 우리처럼 모든 가능한 약을 다 쓴 환자들이 새로운 시약을 사용하면 10%-15% 성공률을 보인데 반해, 쓰던 항암 약을 새로 배합해서 써보니 50% 성공률을 보였다고 해서 후자를 택하겠다고 했다.
그이는 자신 있게 말하는 김 박사가 마음에 들었고, 기분에 김 박사가 자기를 살려놓을 것 같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진수 박사, 이정신 박사, 김노경 박사 모두 그이의 고교 후배로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새로운 항암치료를 받게 되던 날 그이가 한숨을 내리쉬기에 숨이 차느냐고 물었다. “숨도 차고 기도 차다”고 농담같이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 지겨운 항암치료를 또 받게 된 그이 속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나도 기가 찼다.
5월 17일을 시작으로 항암주사를 맞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그이의 몸 컨디션은 서서히 나빠져 갔다. 그동안 한 번도 토한 적은 없었는데 항암주사를 맞는 날은 엄청나게 토하는 증상이 생겼다. 처음에는 주사를 맞으면서도 집에서 준비해간 음식을 잘 먹은 셈이었으나 점차 먹지 않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아주 까불어졌다가도 어떤 날은 생기가 나서 멀쩡하게 식사도 잘 하는 일이 며칠씩 계속되기도 하는 것이다. 늘 속이 그득하고 더부룩하다며 식사 때는 콜라나 소다수를 마시며 속을 달래곤 했다.
가끔 둘이서 새천년포럼 사무실에 나가 서류 정리를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자료 정리를 하다가도 의자에 기대서 눈을 감다가 또 보다가 하는데 대부분 휴지통 속으로 버리는 것 같았다. 이 다음에 회고록 쓸 때 필요한 자료는 버리지 말자고 했더니 죽으면 그만인데 그런 것은 써서 무엇 하느냐며 오히려 거부반응을 보였다.
등의 통증: 6월 달부터 등 쪽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다. 모든 위암, 췌장암 환자들이 한결같이 초기증세가 등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간으로 전이된 대장암이 또 그 주변의 위나 췌장으로 전이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인원이는 이모부가 등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언니한테 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며 언니의 걱정이 대단했다. 그래도 6, 7월의 월드컵 기간에는 “대~한민국!”을 외치며 아들 가족과 같이 TV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무슨 시합이든 담력이 부족해서 아슬아슬한 장면은 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내가 보면 진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중요한 시합은 보지 않았다. 서재에서 일을 하다가 아파트 단지 전체에서 함성소리가 나거나 그이가 손뼉을 치면 응접실로 뛰어나가 같이 박수를 치곤했다.
그렇게도 귀양살이 같았고, 외로웠던 미국에서의 투병생활이 이제 와서 생각하니 지금보다는 좋았던 시절임을 절감했다. 그러나 이나마 허용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뭔가 쓸 수 있는 약이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도 항암주사가 효과가 있는지, 그런대로 식사를 잘 해서 그럴 때면 나는 행복했다. 행복이 이렇게 작은 일에서 얻어지는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이 먹도록 하기 위해, 교육방송 요리시간을 열심히 보았다. 그렇게 배워서 남편에게 시식을 시켜본 요리 가운데 닭계장이 제일 맛있다는 평을 들었다.
황달기: 9월 달로 접어들면서 남편은 좀 더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9월 24일에 김노경 박사가 나를 보자고 했다. 검사 결과 황달 치수가 높아졌으니 본인에게 정리할 것이 있으면 준비하라고 전하라는 것이다.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여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멍한 기분으로 병실로 들어가니 그이가 왜 보자고 했느냐고 물었다. “지금 쓰는 약에 면역이 생기면 외국에 가겠느냐”고 묻더라며 거짓말을 꾸며댔다. 그러자 그는 자기는 다시는 미국에 안 간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서울에서 먹는 산더덕, 쑥물, 야채물, 홍삼차, 현미차, psp브랜 등을 미국에서는 안 먹어도 간 치수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고 CEA 치수의 변동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서울에 와서 마이토마이신을 맞은 후부터 간 치수가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황달이 나타난 모양이다.
10월 중순부터는 점심 후에 가서 가벼운 운동을 하던 체육관에도 못나가게 되어서 저녁에 둘이 손잡고 아파트를 천천히 열 바퀴씩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