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여: 새해 아침에 나는 “안녕 2001년!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모든 액운을 같이 가지고 가려므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새해를 맞이하면 마음이 새로워진다. ‘새해’라는 그 단어의 매력 때문에 막연한 희망을 품고 며칠을 지냈다. 정초에 양 총영사 부인이 보내준 음식을 데워서 먹고 운동 삼아 호숫가로 나갔다. 한국 같으면 한참 추울 때지만 그곳은 가을 날씨 같이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는 선선한 날이었다.
나는 기분이 상쾌해서 그의 손을 흔들며 가볍게 “여보, 재작년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겠지? 당신의 체중도 늘고 CEA도 줄고.....”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이는 말없이 걷다가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암 선고 받았을 때) 죽을 걸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살 바에야”라고 말했다.
좀처럼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가슴이 찡해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서로를 웃기는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만 생각하면 ‘이것 먹어야 해, 저것 먹어야 해’ 하는 말만 떠오르거든” “나는 당신만 생각하면 ’누워서 쉬어!‘ ’빨리 자!‘라는 말만 떠오르는데”하고 오랫만에 웃었다.
나는 그이의 백혈구, 혈소판, 헤모그로빈 치수가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조금이라도 더 먹게 하려고 안달을 했다. 한편 그이는 늘 내가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자꾸 그만 일하라고 재촉을 했고,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에게 “빨리 자라”고 독촉하곤 했기 때문이다.
새해 항암치료 개시: 1월 7일 항암치료를 받기 전에 의사를 만나는 날이었다. 이 날은 나쁜 소식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CEA가 55에서 99로 올라서 약에 면역성이 생긴 것 같다며 즉시 CT를 찍든지, 한 사이클을 더 해보든지 택하라고 했다.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그 다음에는 C 225는 FDA 인가가 부결되어서 1년 반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약회사가 신청한 서류를 반환했다고 한다. 약을 갖고 한국으로 간다는 우리의 희망은 사라진 것이다.
세 번째로 들은 것은 병원비의 25% 할인 혜택이 안 된다는 통보였다. 할인 혜택을 결정해준 멘델슨 회장이 당시 유명한 엔론(Enron) 스캔들에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동안 무료로 제공해 온 CPT-11도 외국인이라 중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우울한 날에 하필이면 병원비 독촉장이 왔다.
FDA가 서류를 반환한 이유는 임상실험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도 한국 못지않게 곳곳에 부정행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목을 빼고 FDA 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실망한 환자들이 많았다. 우리도 진성규 변호사도 그런 환자에 속했다. 그 약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그동안 효과가 있어서 생명을 1년 더 연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희망의 줄이 끊긴 듯한 기분으로 다음 항암 치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부 전화를 가끔 해오던 신성오 대사, 정태익 대사내외, 선준영 대사내외로부터 좋은 소식이 왔다. 신 대사는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정 대사는 주 러시아대사로, 선준영 차관은 주 유엔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잘 되었어. 다행이야”라는 그의 모놀로그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같이 살면서 그이만큼 남의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런 점은 성우도 닮아서 자기 친구들이 잘 되면 마치 자기의 일같이 우리에게 이메일로 알려준다. 착한 천성을 가진 부자에 비하면 나는 그렇지 못한 구석이 많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다.
2월 6일 앞으로 6주간의 사이클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아브루지즈 박사 말에 의하면 6개월 지속적으로 암세포의 크기에 변동이 없을 때만 안정적 (stable)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이의 암세포와 피검사 결과는 기복이 심해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사약 때문에 메스꺼운 증세가 완전히 가시기 전에 칠순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2월 9일 명인성 회장 내외가 자기네 콘도미니움 파티장에서 교포들과 목사님을 모시고, 칠순잔치를 해주었다. 객지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명 회장 내외가 너무 고마왔다. 연세대 정외과 교수였던 서석준 박사 내외도 참석을 해서 그이는 몇십 년 만에 은사님을 만나게 되어 감개무량해 했다.
발병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가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데 말솜씨는 여전해서 마음이 놓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환자 같지 않았다. 성우네가 온다고 하는 것을 극구 말렸더니 여비 대신 병원비에 보태 쓰라고 돈을 보내주었다.
참석한 분들이 모두 선물을 갖고 왔다. 전혀 우리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망이 없는 환자를 위해 그런 배려를 해주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기분전환이 되어서인지 며칠간은 식사도 잘 하는 편이었다.
2월 27일은 우리에게 찾아온 암흑의 날 (black day)이었다. 3주간의 항암치료, 즉 한 사이클의 반을 마치고 피검사를 했더니 CEA 치수가 71에서 184로 뛰었다는 것이다. 아부르지즈 박사는 암세포가 C-225에 내성이 생겼으니 그 이상 사용할 가치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다음에는 마이토마이신 주사와 젤로다를 함께 사용해보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마이토마이신과 젤로다는 서울에도 있으니 2개월 치료를 해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서울에 간 진 변호사 부인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진 변호사는 마이토마이신을 썼더니 머리가 빠지고 이제 CEA 치수는 따지지도 않는 상황에 왔다며 울먹였다. 돌아간 서울의 환자들이 모두 2, 3년간의 고생, 고생 끝에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이가 일어나기 전에 아침 죽을 쑤면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앞날이 캄캄했다. 아침을 먹고 운동하러 체육관에 가자고 하자 “운동해도 죽으려면 죽는 건데 운동은 해서 무엇 하느냐”며 오랜만에 팝송을 부르며 후렴을 반복했다.
Whatever wil be, 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The future's not ours to see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Que sera, sera (케 세라 세라)
Whatever will be, will be (무엇이 되든지 간에)
※ [Que sera, sera = 어떤 일이 생길까, 어떻게 될까, 될 대로 되라 등으로 해석]
유학시절에 Doris Day를 따라 신나게 부르던 노래를 몇 십 년이 흐른 오늘, 자포자기조로 단어를 바꾸어 부르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기에 가슴이 아려왔다. 너무나 가엾어서 죽고 싶었다.
1주일간 송별회 모임에도 가고 짐도 싸느라고 바빴다. 1년 이상 살았더니 은근히 짐이 많았다. 다시 휴스턴으로 오게 될 때를 대비해서 일부는 양 총영사에게 맡겼다. 드디어 3월 8일 휴스턴을 뒤로 하고 양 총영사, 손 영사, 박 영사의 배웅을 받으며 그리운 고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가고 싶고 그리웠던 서울로 돌아가는데 마음은 개운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이 내 마음을 뒤덮었다. 그이는 늘 그렇듯 아무 말이 없었고 괴로워하는 나에게 “하늘이 오라면 가야지 별수 있느냐”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늘의 뜻을 받아드린 사람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