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 사람들과 추억들 (126회)

신세 진 분들: 암센터로 치료를 받으러 오는 한국인 환자들은 모두 자동차를 한대씩 렌트를 하는데 한 달에 2천불씩 들어서 우리는 포기를 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교통수단 때문에 신세진 분들이 많았다.

우리 아파트 가까이 랜덜스 (Randals)라는 슈퍼가 있어서 웬만한 것은 카트에 실어서 아파트 앞까지 갖고 올 수가 있지만 과일과 야채가격이 더 싸다는 피에스타 (Fiesta) 슈퍼나 한인 마케트는 멀리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임 총영사 후임으로 온 양복렬 총영사도 주사 맞는 날에는 자동차를 보내주었고 부인의 김치솜씨가 대단해서 맛있는 김치를 주기적으로 보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총영사관의 장근호 영사와 송건부 영사 내외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아서 어두운 투병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

휴스턴으로 떠나기 전에 친구인 임원명(전 덕성여대 교수)이가 자기 여동생 친구가 휴스턴에서 성공한 석유사업가와 살고 있다며 연락을 해놓겠다고 했다. 과연 전화가 왔는데 알고 보니 부인은 여학교 후배이고, 남편은 서울공대 학생 시절에 부산에서 그이와 같이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미국 유학시절, 여름방학에 L.A. 복숭아 과수원에서 코피 흘리며 아르바이트를 같이 한 사이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무정한 세월은 반세기만에 청년이었던 두 남자를 반백으로 만들어, 반가운 상봉을 시켜 주었다. 그렇게 해서 명인성 박사 내외와 교류가 시작되었고, 우리가 휴스턴을 떠나는 날까지 매주 목요일에 우리에게 외식을 시켜주고 교회에도 같이 가는 등 많은 시간을 나누었다. 명 박사 부인도 직장암을 앓았으나 완치된 후 내외의 믿음이 돈독해졌다고 했다.

휴스턴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으로 초대받아 간 집이 연대 동문인 임병주 회장댁이었다. 그 댁에서 우연히 이대 정외과 제자인 권성하 부부를 만났다. 최치시 박사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온 권성하는 현재 한국은행 박승 총재의 처제이기도 하다.

그 후 최 박사 집도 가보았는데 성공해서 잘 사는 것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의사인 최 박사의 신세도 많이 지게 되었다. 귀국할 때는 고급 클럽에서 환송회도 해주었고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이의 컨디션이 좋을 때면 골프 대접도 받았다.

이재근 회장, 하인태 회장, 임성빈 회장 등 전 평통자문 위원회 회장들의 신세도 많이 졌다. 연대 동문과 경기 동문들도 만났다. 그 가운데 암으로 아내를 잃은지 얼마 안 되는 그이의 후배 김학래 박사도 있었는데 김용래 전 총무처장관의 아우가 된다고 했다.

임병효 총영사의 소개로 라이스 대학의 채수찬 경제학 교수 내외를 알게 되었다. 두 내외의 안내로 남부의 하버드라고 알려진 라이스 대학에서 식사도 대접받고 교내에 있는 짐 베이커 (Jim Baker) 기념관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전시된 여러 사진에 레이건 대통령의 서명이 있었다. 형식적으로 이름만 싸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마다 유머있는 한마디씩을 써넣어서 흥미로왔다.

채 교수는 북한을 개방시키는 방법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해 주었다. 한국 단독으로 북한을 원조하기보다는 국제기구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외부와의 접촉이 빈번해져서 개방개혁의 길이 열릴 것 같다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채 교수는 지금 열린우리당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채수찬 전 라이스대학 교수 [출처 ; KIST 대학 홈페이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경기여고 40회 동기인 이혜영이를 꼭 50년 만에 이곳에서 만났다. (꼭 50년 만에 만난 것이다.) 지질학 박사와 결혼한 혜영이는 미국화가 되어 있었고 특히 미국인 교회에서 내외가 상당한 위치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서 무척 자랑스러웠다. 양 갈래 머리의 10대 소녀들이 흰머리를 염색한 60대의 노인이 되어서 만나게 되니 감개무량했다.

목장 예배: 김의신 박사가 매주 금요일은 목장에 가는 날이라고 해서 우리는 김 박사가 부유해서 목장까지 소유하고, 주말이면 그곳으로 쉬러 가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목장’이란 한인 침례교회 교인들끼리 그룹을 짜서 예배를 보는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예배를 본다는 것이다. 목장 운영은 한국에서도 답사하러 올 정도로 성공적이라고 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 내의 암 환자들과 가족들도 김 박사의 주도하에 매주 금요일 저녁식사 후 예배를 보고 후식을 먹으며 담소하는 ‘목장 모임’을 갖게 되었다. 설교는 김 박사가 하고 담소 시간에는 환자들의 검사 결과를 미리 알려주며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교환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에게 김 박사를 소개해준 삼성의료원 산부인과 이재호 박사(지금은 암센터 원장)가 마침 크리스마스 휴가에 휴스턴에 오셔서 우리 목장 식구들 모두를 자택으로 초대해 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환자들과 가족들을 김 박사의 목장식구들이라고 초대해, 온갖 정성을 다해서 대접을 해준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은 아직은 살만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이는 목장에선 주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찬송가를 부를 때면 거의 모두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 중에서도 매번 부르는 찬송가는 528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이었다.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모든 병을 고쳐주마 주 약속하셨네

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 앞에 구하오니

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주소서

찬송가를 부르는 환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을까?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하고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과연 저들의 절규가 하나님 귀에까지 들릴까?

“주님! 제발 저들의 찬송을 들어주세요!” 함께 찬송을 하면서 속으로 애원했다.

우리가 휴스턴에 간지 반년이 넘어서 정영훈 의원 내외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알아보니 부인이 세브란스에서 폐암 수술한 것이 도져서 왔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아내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곡한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남자가 우니 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따라 잘 못 먹는 남편을 집에 두고 와서, 함께 울고 말았다. 제삼자가 이런 말을 들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암환자 가족은 자나 깨나 가슴이 젖은 상태에서, 남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곧바로 전이되는 것이다.

전유택 박사도 명인성 박사와 같은 목장 식구라고 해서 그 댁에도 가보았다. 엔지니어인 전 박사는 5년 후면 퇴임하고 연변에 있는 대학에서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했다. 젊은 부부가 미국에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연변과 같은 어려운 환경을 찾아간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휴스턴에서 알게 된 한인 침례교회의 목장제도는 교인들의 친교와 신앙심을 튼튼하게 만드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교회가 대규모화 되어가면서 교인들 간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오늘날, 최영기 목사님은 목장이라는 방법으로 모든 교인들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