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준비
두개의 분수가 전등 빛을 타고 무지개 색을 연출하며 높이 솟아오르고, 물소리는 개구리 우는 소리와 함께 합창을 한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을 환자가 아닌 건강한 부부가 손잡고 걷는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그림일까! 둘이서 달을 보고 빌어보기기도 하고, 별들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큰 별을 찾아 축복해달라고 속삭여보기도 했다.
호숫가는 또한 “미안해”를 그이가 나에게 연발하던 곳이기도 하다. “당신이 노후를 준비하자고 할 때마다 신경질 냈던 것 미안해”라는 것 외에는 왜 자주 그 말을 했는지 이유를 물으면 대답을 하지 않았다.
50대 이후를 대비하는 주변 친구들의 다양한 재테크 사례를 접할 때마다 나는 생소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었다. 돈만 생기면 지역구로 갖고 가서 아까운 줄 모르고 쓰는 남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짠순이가 되었고, 내 수입은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편에게 우리도 뭔가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할 때면 그이는 항상 “당신, 내가 세끼는 꼭 먹여 줄 테니까 제발 ‘노후’라는 말만 하지 말어”라고 대꾸를 했다.
대학교수 친구들이 약간의 계약금과 은행대출로 5층짜리 빌딩을 공동구입하자는 제의를 했었다. 그러면 퇴임 후 그 임대료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솔깃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런 큰일을 혼자 저지를 위인이 못되는 나는 남편한테 의논을 했다.
그는 일언지하에 짤랐다. 정치인의 아내가 부동산 투기한다는 말이나 듣는다며 “제발” “제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려서 손을 뗐다. 다른 교수들은 그때 장만한 빌딩의 임대로 은퇴 후 생활비에 조달하고 있다.
호숫가에서 그의 고백은 자기는 80세까지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 대비한다는 말을 병에 걸린 후에야 실감하게 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역구만 아니었으면 당신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었는데... 미안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후회하는 남편에게 “하기야 우리는 부동산 운이 없으니 그때 샀더라도 또 망했을지 모르니 다 잊어버리자”고 했다. 왜냐면 우리는 아파트를 조금씩 늘리려고 팔고 나면 한 달 만에 그 집이 배로 올라가는 경험을 두 번이나 했기 때문이다.
밤 11시가 되면 분수 소리도 꺼지고 신나게 울어대던 개구리 소리도 잠잠해지면서 주변이 고요해진다. 그이도 잠들고 나면 나는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화기에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속도가 느려 신경질이 나지만,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쓰면서 혼자 울기도 하고, 한숨도 쉬었다.
가계부를 정리하면서 다음 치료비 걱정도 하고, 마지막으로 일기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나 혼자만의 낙이 있다면 일기에 내 기분을 낱낱이 적어 내려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1970년대부터 거의 매일 일기와 가계부를 써왔다. 가끔 일기를 읽어 보면 행복하던 일들보다는 힘들고 불행했던 일들이 주로 기록되어 있어서 혼자 미소를 짓는다.
정년퇴임 후 컴퓨터를 배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컴퓨터 때문에 서울과의 장거리 전화 경비도 절약할 수가 있었고 수시로 연락이 가능했다.
늘 일을 마치고 밖을 내다보면 단지 내 체육관에는 사람도 없는데 불이 환하게 밝혀있고 두 대의 텔레비전이 켜져 있다. 그럴 때면 내 집도 아닌데 전력 낭비가 걱정이 되곤 했다. 낮이고 밤이고 둘이 운동하고 나올 때, TV도 끄고 불도 끄고 다니면 그이는 “당신이 이곳에 취직하지 그래”라며 놀렸다. 무엇이건 아끼는 버릇이 몸에 배었나보다. 모두 20대 궁색한 유학시절에 생긴 근검절약 습성일 것이다.
다른 환자들은 서울의 자녀들이 번갈아 와서 도와주고 갔다. 우리는 자식이라야 아들 하나 밖에 없고, 무척 바쁜 직장인인데다가, 여비 생각이 나서 오지 말라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구정 연휴를 이용해 1주일 휴가를 얻은 아들은 방학 중인 대학교수 며느리와 함께 휴스턴을 방문했다.
막상 객지에서 만나니 그이는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도 커지고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일주일 후 그들이 떠나고 나니 아이들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오기 전보다 더 허전하고, 우리 아파트는 다시 정적에 잠겼다. 여비며 병원비며 아이들이 과용하고 간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매주 서울에서 전화를 할 때마다 몇 시간의 정신적인 약효가 생긴다. 그전에는 바쁜 생활에 파묻혀서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아버지가 휴스턴에서는 일요일 오전만 되면 응접실로 나와 전화벨 울릴 때를 기다렸다. 우리도 별수 없이 늙어간다는 징조였다.
나의 사회활동에 종지부
남편 따라 미국으로 오기 전에 한국에서 하던 일들은 모두 매듭을 지었다.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자리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구두로 표명했으나 김광웅 위원장이 임기가 남아 있으니 그냥 다녀오라고 했다. 막상 미국으로 가보니 남편의 치료가 장기화되어 2001년 1월 말에 이희호 여사, 한광옥 실장 그리고 김광웅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쓰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오는지….
그보다 더한 자리 제의가 왔어도 가정과 남편을 위해서 양보하고 포기하면서 전혀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후회도 없었다. 그런데 파트타임이었던 인사위를 그만두려는데 왜 미련이 남을까? 아마도 그 자리가 내 생애에 주어진 마지막 공직이어서일까?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김광웅 위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자리는 비상임이고 임기가 있으며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고 있다오라”며 사직원은 자기가 갖고 있겠다는 말을 들으면서, 눈물이 고였다. 평소에 인정이 많은 김 위원장의 진심어린 배려에 감동했다.
청와대 보고가 있기는 하나 한광옥 실장에게 잘 말해 주겠다며, 한국에 다녀갈 수 있다면 여비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병든 남편을 혼자 두고 잠시라도 귀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의를 고집했으나 김 위원장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한 달 후 인사위의 최석충 처장이 전화를 해서 내 후임으로 박영숙 전 의원이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김 위원장이 내 사직원을 제출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데, 내가 이희호 여사에게 쓴 편지 때문에 후임자가 결정되었다는 이야기었다. 후임자를 속히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특히 박 의원 같은 좋은 분이 맡게 되어서 기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을 이런 때 쓰는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의 병만 완치된다면 그 무엇이 탐이 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