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돈에 대한 생각 (124회)

그해 1월 22일 권노갑 의원 내외가 텍사스 주의 오스틴 비행장에서 전화를 했다. L.A.에서 인권상을 수상하고 신시내티에 사는 손자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병원비에 보태 쓰라고 얼마를 보내주었다. 후배인 권 의원 부인이 아답타겐이라는 일본산 고급 약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 후 치료 중에 귀국했을 때도 권 의원이 식사대접도 해주고 여비에 보태 쓰라고 도와주기도 했다. 정치인들이란 흔히 계산이 빠르다는 평을 듣는 사회에서, 전혀 가망이 없는 환자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그분에 대해, 남들은 뭐라고 해도 나는 아직도 그분 마음씨에 감사하고 있다. 우리가 휴스턴에서 15개월간을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은 이렇게 수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휴스턴의 안용준 연방검사 내외는 우리와 가끔 만나면서 병원비가 벅차다는 사정을 들었다. 얼마 후 MDA 이사장에게 우리 이야기를 했더니 병원 책임자들과 같이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자리에 안 검사와 같이 참석했다. 병원 이사장의 아파트는 과거에 부시 대통령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데 과연 최고급 건물이며 기억(ㄱ)자로 된 두 면의 전면이 유리창이어서 휴스턴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화 아파트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병원 책임자 되는 분에게, 전에는 멘델슨 회장 덕분에 25% 할인을 받았으나, 엔론사와의 개입설이 터지면서 그 혜택이 끊겼다고 호소했다. 자기가 당장 알아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친절히 말해주었다.

이 날도 외국에서 의료보험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20여 년간 국회의원으로 봉직했는데 퇴직금도 연금도 없느냐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 날 우리는 큰 기대를 하고 돌아왔으나, 그 다음 주 주치의가 그동안의 약에 면역이 생겼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선고를 하게 되어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자리를 마련해준 안 검사(지금은 재미 변호사)가 너무나 고마웠다.

우리 내외는 재벌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아쉬운 것 없이 살 수 있는 형편이었다. 두 사람이 한 번도 쉬지 않고 맞벌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이라는 무서운 액운이 닥칠 것에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더구나 외국에서의 병원비를 충당할 정도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남편이 아프기 전까지는 돈에 대한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휴스턴에서 쌓여가는 치료비와의 싸움에서 힘이 들어서인지, 인생에서 명예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었다.

객지에서 남편의 암 치료를 하면서 속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노후의 재력, 병에 걸렸을 때의 재력은 필수조건이다. 풍부한 재력으로 남을 도우며 사는 인생이, 재력 없는 명예보다 실질적이라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마음껏 베풀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객지에서 투병생활에 경제난을 겪는 우리를 보고 “깨끗한 정치를 하셨다는 명예가 있잖아요?”라고 위로를 해주지만, 그런 말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아무리 높은 지위에서 명예와 명성을 떨쳤다 해도 노후에 경제력이 없고 건강을 잃으면 비참한 인생이 아닌가! 내 수중에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자연히 남의 신세를 지게 되고 그러다보니 구질구질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다른 길을 택하리라! 다짐도 여러 번 해보았다.

▲ 병원비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던 권노갑 전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

내가 이런 속물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은 모르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돈에 관한 이야기를 그이는 제일 싫어했고, 또 환자에게 그런 말을 해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자동차 없는 미국 생활도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나보다 낮은 곳을 보며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추슬렀다.

휴스턴에 도착한지 근 두 달 만인 2001년 1월 20일 텔레비전을 통해서 부시 대통령 취임식을 지켜보았다. 성서 위에 손을 얹고 선서식을 마친 후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과 감격의 포옹을 할 때 부자의 눈에서 동시에 이슬이 맺혔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 아버지 부시 전대통령 취임식 때는 봉두완, 이태섭, 이종찬 의원 내외들과 같이 참석했었는데... 지금은 어두침침한 작은 아파트에서 화면을 통해서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지켜보니 쓸쓸하고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려서 꿈이 많았고 자신감에 가득 찬 소녀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목표도 일찌감치 구체화되어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학업에 전념했다. 그런데 박정수라는 남자를 만난 후부터 그전의 이범준이 아니었다. 부산 송도에서 나는 “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사랑에 빠진 첫 남자니까”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었다.

그 이후 박정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인생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부란 참으로 불가사의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남편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의 인생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렸고, 그이의 건강회복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결혼한다고 할 때 강원용 목사님은 잘 맞지 않는다고 반대를 하셨다. 후일 강 목사님은 “잘 살 것 같은 부부들은 헤어지고, 안 맞는다고 생각한 박정수・이범준 부부는 성공한 케이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속으로 세상에 공짜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고 중얼거렸다.

서로의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합이기 때문에, 설령 잔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려도 깊이 박힌 뿌리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바로 그런 부부관계였다.

졸지에 외국 땅에서 가엾은 환자로 변한 그이를 간호하다가도,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신세타령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환자에게 그런 내색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귀양살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TV 영화에서 한 부인이 구치소에 감금된 건강한 남편을 면회하러가는 장면을 보면서 차라리 나도 그 부인의 입장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소냐 투병이냐 양자택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감옥소에 있으면 언제고 풀려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으나 불치의 암과의 싸움은 너무나 참담해서, 질곡 같은 어두움 그 자체였다.

휴스턴 아파트 단지 내 호숫가는 잊을 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이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추억의 보물창고다. 저녁식사 후 둘이서 손잡고 거닐던 곳, 그동안 못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곳, 지나온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서로에게 고백하던 곳,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성장해 오는 과정을 되돌아보던 곳,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했던 마음을 털어놓았던 곳이 바로 휴스턴 파크 반델빌트 아파트단지 내의 호숫가이다.

이 호숫가를 걸으면서 나는 잡은 남편 손에 힘을 주면서 “젊어서는 왜 그렇게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서 안달을 했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지나치게 보채니까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그래? 그럼 24시간 같이 지내보라고 하신 모양이지?” “아니, 당신이나 나는 전생에 큰 죄를 지었나봐.”

유치한 말을 계속 지껄이면서 묵묵부답으로 걷기만 하는 남편 기분을 업 시키려고 애를 쓴 곳이다. 또 아들에게 미안했던 일들을 둘이 주고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아들아이와 동갑인 존 케네디 2세가 고등학교 시절 목걸이를 한 사진을 TV에서 보고 그 시절 제 또래가 다 하는 목걸이를 성우가 방학 때 갖고 나왔다고 심하게 야단치던 일이 후회가 된다고 그이가 마음 아파하던 곳이기도 하다.

낮에는 그이가 좋아하는 ‘구름 쳐다보기’를 즐긴 곳도 이 호숫가를 걸을 때였다. 파란 하늘을 누비고 다니며 온갖 모양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의 호에 구름 운자가 들어있다고 했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밤하늘의 조각달도 바로 손에 닿을 듯 윤곽이 뚜렷하고 수많은 별들은 유난히 물기어린 듯 차가운 빛을 발하면 호숫가의 밤은 환상적인 장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