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비 (123회)

암 선고 이후 민망할 정도로 말이 없어지고 무표정하던 남편이, 8월 달 CEA 수치가 정상인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CT 사진에도 암세포가 자라지 않게 되면서 다시 이야기도 하고 특유의 유머도 발휘하게 되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미국에 간 직후 한동안 치료시간과 신문을 읽는 시간 외는 거의 침대에 서 시간을 보냈으나, 차차 응접실로 나와서 책도 읽고 TV도 시청하게 되었다. 오후에는 아파트 단지 내 체육관에도 가고 저녁식사 후에는 호숫가를 걸었다. 체중도 66kg에서 75kg으로 늘었다. 문안 전화가 오면 “많이 나아지고 있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완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메스꺼운 증세가 없을 때면 독서를 많이 했다. 그 가운데 거겐 (David Gergen)의 Eyewittness to Power는 미국 역대 대통령의 통치력에 관해 쓴 책인데, 무척 흥미있게 읽었다. 낸씨 레이건 (Nancy Reagan)의 저서인 I Love You Ron은 레이건 대통령의 애틋한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책이었고, 힐러리 클린턴 (Hillary Rodham Clinton) 전기야말로 몰랐던 클린턴 부부에 관한 정보가 가득 담겨 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그밖에도 랄프 호클리 (Ralph M. Hockley)의 Freedom is not Free, 링컨 대통령의 전기, 김장환 목사님의 자서전, 각종 월간 잡지 등, 독서로 객지에서의 고통을 달랬다.

CEA 수치가 떨어지면서 그이의 컨디션이 낳아지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컨디션이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매주 한 번씩 하루 종일 항암주사를 맞고 나면 3~4일간 고생한 후 겨우 2~3일 정상으로 돌아오고, 다시 주사를 맞는 반복되는 생활을 10개월 이상 계속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이 같은 체력이니 그만큼 버틸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CEA 수치가 내려가도 전반적인 몸 컨디션은 점점 기력이 떨어지고 힘들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이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올 때는 정말 힘들다는 뜻이다. 웬만한 일은 말없이 혼자 참아내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침실 하나에 응접실과 부엌, 식당이 붙어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그이가 몸이 괴로워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면, 나는 라디오 코리아를 틀어 주었다. 김동길 교수의 목소리도 나오고, 한인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 등 다양한 방송프로를 즐겨 듣게 되었다. 처음에 들어간 아파트는 호숫가가 보이는 남향집이었으나 우리를 도와주러 온 아주머니가 돌아간 후 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원래 그이는 디스크를 앓았기 때문에, 잠이 든 사이에 가만히 혼자서 2층 계단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내려오다가 왼쪽 등 근육을 다쳤다. 지금도 그때 다친 자리의 근육이 당긴다. 휴스턴의 훈장과 같은 통증이다. 그때는 지옥같이 여겨졌던 상황이, 지금은 등의 근육이 당길 때마다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남편이 없는 지금은,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괴로웠던 기억도 모두가 내게는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MDA 병원은 한국과 같이 2주일마다 계산서가 나오지 않고, 근 한 달 넘어서 치료비 청구를 받게 된다. 경리부 여직원이 우리를 불러 총액을 알려주고 납부기일을 통보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 여자가 전화를 하면 또 돈 낼 때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젤로다를 복용할 때는 경비가 별로 들지 않은 편이었으나 항암 주사약을 쓰면서 치료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첫 병원비 청구서를 보고 나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명세서는 요구를 해야 주는데 지금 대충 기억나는 것은 주치의를 10분 정도 만났는데 진료비 300불, 엑스레이나 CT필름 판독비가 200불, 주사를 맞는 방을 몇 시간 사용했는지, 링거 줄 값까지 세분화해서 단가를 매겼다.

똑 같은 항암치료를 받아도 날짜마다 비용이 달랐다. 한번에 2.300불이나 차이가 났다. 궁금하던 차에 어느 날 한국 간호사가 우연히 우리 주사실에 들렸기에 물어보았다. 항암주사를 다 맞은 후 담당 간호사가 simple, medium, complicated 가운데 어떻게 기록을 하느냐에 따라서 가격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일단 주사실에 들어가서 10분을 기다렸든, 간호사가 바빠서 40분을 기다렸든 들어간 시간부터 끝나서 나올 때까지의 시간에 대한 비용을 물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우리는 의료 보험이 없다고 담당 간호사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대부분 재벌들이 와서 그런지 한국 환자들은 모두 부자라는 선입관이 간호사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다행히 임 총영사가 우리를 위해서 존 멘델슨 (John Mendelsohn) 병원장과 라이스 대학의 말콤 질리스 (Malcom Gilis) 총장을 한자리에 초대해서 오찬을 갖게 되었다. 멘델슨 원장은 자기가 1981년에 대장암 치료약으로 C 225를 발명했다고 자랑했다.

며칠 후 나는 멘델슨 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 국회의원은 퇴직금이나 연금 혜택이 없고 더구나 미국에 온 후 보험도 없으니 재정적으로 너무 힘이 든다는 하소연을 한 후, 병원비를 할인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국 정치인들이 퇴직금도 연금 혜택도 못 받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으나 고맙게도 25%를 할인해주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치료비 걱정을 하고 있으면, 서울의 아들이나 친지들, 미국에 사는 형제들과 친구들로부터 지원금이 오곤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리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선길 장관은 서울에서 치료비 모금을 위하여 애를 많이 썼다. 김 장관이 박태준 총리도 만나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원래 박 장관을 내가 미국으로 가라고 했다며” 두 번에 걸쳐서 도와주셨다. 덕분에 힘든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다.

▲ 박태준 전 국무총리 [출처 ; e영상역사관]

이렇게 조건 없이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말로는 형용할 길이 없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대가도 바랄 수 없는 암환자를 도와준다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자선이기 때문이다.

2001년 3월 중순경, 자민련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남았던 강창희 의원 내외가 부인의 병을 위해서 휴스턴에 들렸다. 부인이 12년 전 유방암 수술을 했는데 폐로 전이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휴스턴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5월 달에 다시 돌아왔다. 부인은 수심에 차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가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있는데 강 의원이 주사실에 들렸다. 자기 부인의 폐에 있는 것은 암이 아니고 염증으로 판명이 나서 흡입수술로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우리도 뛸 듯이 기뻤다. 암환자가 주부인 경우, 그 가정은 더욱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치료를 마치고 5월 22일 강창희 의원 부부의 자축파티에 참석했다. 암으로 알았다가 염증으로 판명이 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 강 의원 부부는 아마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부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강 의원이 아내의 치료비로 준비해왔다는 거금을 우리에게 주었다. 아무리 기적과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해도, 남에게 선뜻 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깜짝 놀랐고 무한히 고마웠다. 그들의 마음씨를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