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225와 CPT-11 항암약 (121회)

아브루지즈 (Abbruzzeze)박사로 교체되었다. 아브루지즈 박사는 종양내과 과장이며 세계 암학회의 임원이어서 무척 바쁜 의사라는 말을 들었다. 과연 환자의 기록을 자세히 읽어볼 시간도 없는 의사였다. 하여간 새로 바뀐 주치의사가 CEA 치수가 1400에서 400으로 떨어졌으니 하루에 8알씩 먹던 약을 6알로 줄이고 두주일마다 한 주일 쉬는 것을 두 주일을 쉬라고 했다.

젤로다의 부작용은 한국에서 쓰던 항암 주사약보다는 심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발톱이 까매지고 진물이 나와서 매일 밤 연고를 발라주었다. 젤로다를 복용하는 다른 환자들도 발톱 때문에 샌달을 신고 다녀서 우리도 샌달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이상하더니, 격식이 없는 미국사회여서인지 차차 익숙해졌다.

객지에서도 그의 69회 생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미역국으로 아침을 하고 전날 꿈이 좋았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는 말로 남편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무슨 꿈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아침에는 비가 왔는데 조찬 후 활짝 개여서 아파트를 환하게 밝혀 주었다. 그이가 식사 후 침대로 안가고 거겐 (David Gergen)책을 들고 응접실로 나와서 독서를 하는 것을 보아 컨디션이 회복된 듯 보였다.

저녁에는 임 총영사가 직원부부들과 함께 식당으로 초대해 주어서 화기애애한 생일을 보냈다. 그이도 기분이 좋았는지 자기의 유학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식당 안쪽에서는 미국 노부부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무척 보기가 좋았다. 허리는 비록 구부정했으나 춤을 출 수 있는 그들의 건강이 부러웠다.

아브루지즈 박사의 판단으로는 젤로다에 면역이 생겼으니, FDA 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실험약인 C 225를 CPT-11과 같이 사용하자고 했다. 그나마 C 225는 아무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약이 아니었다. 우리도 수속한지 4개월 만에 사용 허가가 나왔으며 그이가 이 병원에서 첫 케이스라고 했다. 그동안 실험을 통해서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만이 반응이 좋았고 전국적으로 10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오고 있다고 했다.

이본 라쎄르 (Yvonne Lassere)와 미찌코 이와사끼(Michiko Iwasaki) 씨가 새로운 치료 계획안을 담당할 직원으로 지정되었다. 이들과 만나서 어떤 부작용도 감수하겠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미국에 처음 와서 실험약을 쓴다는 데 대해 가졌던 공포심과는 달리 이번에는 우리 둘 다 침착했다. 그것은 C 225라는 실험약 외의 대안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느끼는 체념 같은 것이었다. 그날도 저녁 식사 후 쓰레기 봉투를 갖다버리고 우리는 가랑비 내리는 호숫가를 우산을 쓰고 걸었다.

“김 전도사가 힘주어 읽은 로마서 8장 18절의 ‘오늘의 고난은 앞으로의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을 믿어요. 인원이(의사 조카)의 말대로 인명재천인 만큼 운명은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니 맡겨봅시다.”

속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남편에게는 듣기 좋은 말을 건넸다. 그이는 조용히 걷다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야 어떻게 되든 괜찮은데 고생하는 당신이 가엾어서 마음이 아프지”라고 말했다. 나는 콧등이 시큰거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걷기만 했다.

성연이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병실을 청소하는데 항상 근심어린 우울한 내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엄마, 나는 언제 엄마 얼굴에 웃음이 있게 할 수 있지?”라는 것이다. 나는 성연이의 그 말이 항상 귀에 쟁쟁해서, 가엾은 딸 앞에서 감정 조절을 못했던 내가 미웠다. 그래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편에게는 가급적 우울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성우도 아빠를 위해서 엄마가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충고를 했다. 목소리도 더 명랑하게 해보려고 하고, 마음에 없는 말도 해보고....

이렇게 나날을 보내다가도 한국에서 친정 오빠나 언니가 위로 전화를 하면 흐르는 눈물을 남편 몰래 닦기에 바빴다. 형제 중 막내인 나는 언니와 오빠가 친정 부모님과 같았다. 오빠는 “실험약을 쓴다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의 실험 약에 대해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잠을 설치고 나니 입술이 부풀어서 보기 흉하게 되었다.

병원 경리실에 붙어있는 좋은 글귀를 베껴서 내 노트북 아래에 붙여 놓고 마음이 불편할 때면 한 번씩 읽어 보았다:

God gave me the serenity to accept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 봉두완 전 의원 [출처 ; 국회방송 캡처]

새로운 실험약을 쓰는 데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때 봉두완 의원 내외가 L.A.에서 전화를 했다. 천주교회 일로 세계 도처를 돌아다니다가 귀국하게 되었다고 했다. 잊지 않고 문안전화를 해준 것이 고마웠다. 건강하게 봉사활동을 하는 그 부부가 몹시 부러웠다. 봉 의원은“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갇혀 있어서 안됐다”고 위로를 했다.

정말로 이런 생활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사약, 변비약, 항암약, 소화제, 항생제, 소염제 등등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 다음날은 라디오 코리아를 듣고 있는데 한승수 외교부장관의 전화가 왔다. 미국에 들렀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공사로 바쁜 가운데 그이에게 위로 전화를 해준 것이다. 그이는 “반기문 차관의 인품이나 실력을 봐서도 장관이 계속 기용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휴스턴의 임병효 총영사에게도 격려 전화를 부탁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평소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환자가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

4월 13일 첫 사이클의 첫 번째 항암주사를 맞는 날이었다. 자동차가 없는 우리는 총영사관에서 보내주는 차를 타거나, 환자들이 병원으로 갈 때 합승을 하기도 하고, 아침 일찍 치료시간이 잡힐 때면 yellow cab(노란색 택시)을 불러서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마음씨 좋은 yellow cab의 흑인 기사를 알게 되었다. 하루 전에 예약을 하면 우리 아파트 앞까지 와 주었다.

하필이면 금요일, 13일에 첫 항암주사를 맞게 되었다. 서양의 미신이지만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 흑인 기사가 느닷없이 “Today is a Good Friday" "Stripes of Jesus will heal you!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일입니다. 그의 옷자락이 당신을 치유할겁니다)"라는 말을 던지는 것이다. 그 말에 내 기분이 밝아졌다. 하나님이 그 기사를 우리에게 보내준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병원으로 들어갔던 그 첫날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날아가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바보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이 우리의 44주년 결혼기념일이며 사귄 기간까지 합하면 5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다 잊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이메일과 선물을 보내주어서 둘이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서울에서는 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는 그이가 연수만큼의 장미꽃을 집으로 배달시키곤 했는데....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