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임명과 천황호칭 (92회)
  제12장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부에서

대사임명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그이가 4강 주재 대사를 임명할 때 곁에서 들은 이야기는 이홍구 전 총리의 주미대사 선임과 이인호 주 핀란드 대사의 러시아대사 선임 건이다. DJ가 이홍구 전 총리를 주미 대사후보로 선호하는 것을 알게 된 그이는 본인에게 간곡히 설득을 했으나 너무나도 완강히 거절을 했다. 보다 못한 나도 부인에게 권유하는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 총리와는 교수시절부터 가까이 지내왔고 평소 그의 학문적인 실력과 인간적인 덕목 때문에 우리가 좋아한 분이었다.

평소 국가이익을 위한 외교는 초당적이어야 한다는 남편의 소신 때문에 이 총리가 비록 한나라당에 몸을 담고 있다 해도 대외관계에서 가장 비중이 큰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한나라당도 환영할 것이라고 믿었다. 불행히도 이 총리가 주미대사로 발령이 나자 한나라당의 이 대사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서 무척 유감스러웠다. 분명히 본인도 괴로웠을 것이다.

여성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그이는 외교부에서도 여성대사를 임명하고 싶다는 의견을 말하기에 나는 이인호 주 핀란드대사를 추천했다. 이 박사와는 교수시절부터 친분이 있고 그가 하버드에서 러시아역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러시아어에도 능통한 인재이다. 대통령께서 강대국에 여성을 보내는데 대해 자신 있느냐고 몇 번씩 그이에게 다짐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워낙 페미니스트인 DJ가 반대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께서 우려를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희호 여사를 만나러 갔다. 국민의 정부가 각 부처 차관은 모두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한 선거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여성을 4강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대사로 임명하면 어느 정도 만회가 되지 않겠느냐는 나 개인의 의견을 말씀드리면서 이인호 박사는 잘 해낼 것이라고 적극 추천을 했다.

언론에서 󰡐여성이 어떻게 보드카를 마시며 사우나에도 갈수가 있느냐󰡑는 등 여성을 비하하는 기사를 실었다. 물론 남성외교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이기는 했다. 반드시 사우나에 가야만 외교를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이 아니다. 그러한 글이 자주 실려서 대통령도 혹시 잘못된 인사는 아닌가 하고 우려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자국의 언어를 구사하고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한 외교관이 공관장으로 부임한 데 대해 환영을 했다는 말을 주한 러시아대사를 통해서 여러 번 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사문제 뿐 아니라 어떤 현안도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하면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아도 받아드려서 기쁘다는 말을 남편으로부터 들었다. 강대국에 여성을 공관장으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최종 인사권자인 국가원수가 받아드리지 않았으면 아무리 그이가 추천을 했어도 불발로 그쳤을 일이었다.

남편의 임기동안 여러 번 외교부 간부들의 의견을 대통령이 받아드렸다는 말도 들었다. 아랫사람들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대통령께 말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대통령이 일단 어떤 의견을 개진하면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 뜻을 관철시키려다 보면 오히려 잡음이 생긴다는 것이 그이의 생각이었다.

천황호칭

또 다른 해프닝은 그이가 일왕을 천황으로 호칭했다고 해서 몇 날 며칠을 두고 신문과 방송에서 두들겨 맞았다. 5월 13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일왕을 천황이라고 부르자 일본기자가 되묻는 질문에 그이는 일본에서 외상을 오부찌라고 부르듯 당신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니까 당신네 관례대로 호칭한 것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연합통신을 타고 나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천황에 대한 기사가 없었다면 기삿거리가 없다는 듯 난리가 났고 모 신문 사설에서는 인신 공격적으로 써댔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고 김철 대변인이 신나게 성명을 발표했다.
 
▲ 일본 오부치 외무장관과

국민회의는 한일관계를 감정적으로만 대응한 전 YS 정권하에서도 천황 호칭을  이미 사용했다고 발표했으나 신문은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김하중 청와대 의전수석은 외교부의 신동익 비서관을 통해서 대통령도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겠다는 말씀이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외교부 사람과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기자들이 “박장관에게 미안하게 되었다. 연합통신 기자 때문에 시작된 것이 그렇게 확대될 줄 몰랐다. 일본 방문 시에는 잘 써주자”고들 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장관이 기자회견을 하면 회견내용이 보도되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은 일언반구도 기사화되지 않고 오로지 천황호칭 사용이 잘못되었다는 점만을 부각시킨 데 대해 실망이 컸다. 

그 후에도 어업문제와 관련해서 방일시 협상카드용으로 쓰려고 준비 중에 있는 내용이 모 신문에 미리 보도되었다며 “큰일이야. 국가이익은 아랑곳없으니…”라고 안타까워했다. 기자들이 특종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최소한의 원칙은 지키는 성숙성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외교 분야 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민감한 사항에 대해 언론이 지켜야 할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무한 국제경쟁시대에 그 손해는 우리 국민이 고스란히 입게 되는 것이다.

천황호칭으로 와글와글하는 정국 속에 5월 15일 문화일보에 이태동(李泰東)서강대 영문학 교수의 <‘천황’ 칭호와 실사구시(實事求是) 외교>라는 제하의 글이 실렸다.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박장관은 천황이라는 호칭을 일본의 고유명사 정도로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그의 몸짓은 김대중 대통령이 실사구시의 기치를 들고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을 위해 양국간의 오랜 걸림돌이 되어온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 대중문화개방 문제 등에 대해 이니셔티브를 쥐고 전향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버리는 것은 일본에 종속되거나 결코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교에서는 지는 것이 이길 수 있는 아이러니가 성립될 수도 있다……일왕을 천황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객관적인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대중 정부와 박정수 장관의 ‘장벽허물기 작업’은 일본과의 경쟁관계를 넘어서서 객관적인 차원에서 等位와 對位法의 동반자 관계를 맺고 상호협력의 길을 열어나가자는 데 있는 듯 하다.

박장관의 ‘천황’에 대한 공식칭호 사용은 외교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패배와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실사구시’의 철학 속에서 가까운 나라를 멀리하지 않고 가까운 위치에 그대로 두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려는 능동적이고도 외교적인 노력으로 볼 수 있겠다.」

DJ정부의 외교기조를 정확하게 표현해준 이 교수를 그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이어령 장관을 통해서 만나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편은 논리 정연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영문학자를 알게 되어 무척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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