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외무부장관 입각 (90회)
  제12장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부에서

3월 3일 장관임명이 정식발표가 되기까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며늘아기가 자기 꿈에 “큰 용이 입에 공 같은 것을 물었는데 붉은 빛이 번쩍 번쩍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태몽이라고 했다. 나는 큰 금 열쇠 한 복판에 빨간 루비가 촘촘히 붙어서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것을 꿈에 보았다. 미신이지만 왠지 이번에는 남편이 입각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월 3일 오전 11시에 내각발표가 있던 날 나는 강의를 하는 중에 “오후 2시에 임명장 수여식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리 쉬면서 양가 부모님 생각을 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내 평생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죽도록 감격했던 순간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우리가 나란히 박사학위를 받던 날이었고 두 번째는 남편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서 막강한 공화당의 중진을 꺾고 당선되던 10대 총선 때였다.

DJ정부는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 부인도 참석시킨 것이 새로운 시도였다. 미국에서는 각료임명장 수여행사에 부인뿐 아니라 가족 모두를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축하해주는 자리를 갖는다.

장관으로 임명 되자마자 모 신문에 그이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에서 학부부터 박사학위 취득하기까지 13년간 고학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으며 체류했지만, 한 번도 영주권을 신청해본 적이 없는데 누가 그런 모략을 했는지 기가 막혔다. 그 것이야 말로 무에서 유를 만든 날조된 허위 기사였다.

언론의 박정수 죽이기가 그때 이미 시작된 것인데,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하기야 언론에서는 누구든 희귀한 정보를 제공하면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활자화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은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그이를 마음먹고 넘어뜨리려는 사람이 언론을 기묘하게 활용할 때는 그 누구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후일에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3월 7일 한남동 장관 공관으로 입주했다. 장관공관은 위치도 좋고 주변 경치도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 정원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내 머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아침이면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으로 산장에 있는 느낌이 들며, 저녁이면 석양이 지는 오색찬란한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공관을 찾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정돈된 정원이 아름답다고 했다. 특히 공관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양쪽 담장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노란색 개나리꽃 길을 나는 유독 좋아했다. 다만 화장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님이 올 때면 냄새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짧은 생활이였지만 공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근면성에 감복했다. 남편의 임기가 그렇게 짧을 줄 몰랐지만 다행한 것은 나를 위해 30년간 가정부로 고생하다가 떠난 할머니를 한번 구경시켜주고 싶어서 두주일간 초청한 일이다. 천국에서 지내다 가는 것 같다며 기뻐하던 그 할머니는 불행히도 곧 세상을 뜨셨다.
 
▲ 그 이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공관 뜰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이는 밤 12시 귀가 후 아파트에서 갖고 간 트레드밀에서 30분씩 걷는 동안 나는 곁에 서서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도 정년퇴임 전 마지막 학기여서 강의준비와 퇴임식 때 발표할 다른 학자들과의 공동 집필에 시간이 모자랐으나 공관 미화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술 자문위원회가 있지만 미술을 전공한 한덕수 통상본부장의 부인 도움도 많이 받았고, 덕분에 현대화랑의 박명자 사장이 협조해 주어 고맙게 생각했다. 장관부인이 되면 의례히 치르는 행사들도 간부 부인들의 도움으로 무난히 치렀다. 바자회 뿐 아니라 외교사절단 부인들을 위한 공관에서의 음악회와 그림 전시회도 개최했다.

여러 활동 가운데 외교관 부인회에서 전개해 온 ‘하루 100원으로 불우이웃 돕기 운동’은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독실한 교인인 이상옥 전 외무장관 부인이 공들여 키워온 운동이라고 들었다. 외국에 나가있는 외교관 부인들에게도 하루 100원 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내서 활성화되는 듯 해 무척 기뻤다. 그러나 후에 들려오는 말로는 반대하는 외교관 부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좋은 운동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른 부처 장관부인들과는 달리 외교부 장관부인의 역할은 다양하다. 외국으로 발령받은 외교관 부인들과 한국으로 새로 부임해 온 외국 대사부인들을 접견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직장 가진 부인이라 남편을 내조하는데 게을리 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남편이 장관이 되자마자 나는 외교부 외교정책 자문위원회 위원직과 통일부의 통일정책 평가위원회 위원직을 내놓았다. 남편이 수장인 외통부는 몰라도 통일부 자리까지 사표를 낸 것은 후회가 된다.
 
매주 수요일에는 적십자사에서 주한 외교사절단 부인들과 같이 봉사활동을 했고 매월 셋째 월요일에는 보훈병원으로 외교부 간부 부인들과 같이 봉사활동을 하러갔다. 갈 때마다 마음이 뿌듯했다. 또 공관은 만찬이나 리셉션이 잦은 곳이라 공관 주변에 대한 사전 점검을 꼼꼼히 챙기는 일에도 최선을 다 했다.

공관에 입주한지 일주일 만에 심의관 이상의 외교부 부인들을 근 70여명을 공관에 초대해서 소위 단체 접견을 하게 되었다. 이날 나는 “인사 문제만 아니면 언제나 누구나 만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모두들 웃었다. 그리고 외교관들의 리셉션에서 흔히 말하는󰡐꿔다놓은 보릿자루󰡑같이 주변에서 맴도는 부인들이 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대화할 수 있는 외교관 부인이 되려면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도 노파심에서 한마디 했다. 외교의 50%는 부인의 몫이기도 하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내 나이가 정년퇴임 연령이고 부인들 가운데는 내가 몸담았던 이대와 성신여대 졸업생들 그리고 직접 내 강의를 들은 제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하기 어렵고 무서운 이범준 교수가 신임장관 부인이라고 해서 외교부 직원 부인들이 겁을 냈다는 말도 들려왔다. 정치인의 부인이니까 정치적일 것이며 대하기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를 대해 보면서 ‘투명하고 때 묻지 않은데 놀랐을뿐 아니라 서민적이어서 대하기가 편했다’는 후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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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관 부인으로서의 역할과 내조 (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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