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정부 출범 (89회)
  제11장 문민정부의 시국에서

YS정권이 물려준 경제파탄이 소위 IMF 한파를 가져왔고 나라전체가 고통을 받게 되었다. 당시 언론에는 IMF 총재인 캉드쉬 이름이 자주 오르내려서 어린 아이들까지 그의 이름을 외울 정도였다. 도처에서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내몰린 가장들과 사업에 실패한 가장들이 졸지에 노숙자로 변해 갔다.

1998년 초 대통령 취임식이 있기 전 국민회의 의원 부인들이 이희호 여사와 같이 여의도 농협지점에 모여 금을 헌납하는 행사를 시작했다. 전국에서 집집마다 장롱에 두었던 금을 내놓았고 정부도 외자유치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즉 새 정부의 첫 과제는 ‘경제살리기’에 집중되었다. 당시 국민 모두 나라경제에 보탬이 되겠다고 모아놓은 금을 아낌없이 헌납한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리무진을 타고 15대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그럴진대 본인들은 얼마나 감개무량했을까? 불가능이 가능해진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영남지역에서 선거운동을 치러본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여간 평화적인 수평적 정권교체가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져 한국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날이었다.

JP가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다수당인 한나라 당의 반대로 내각구성이 지연되었고, 따라서 내각발표도 취임식 이후로 미루어졌다.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당시에 차관만을 먼저 임명했으나 내각구성을 마냥 연기할 수 없어서 전임자인 고건 총리의 재청으로 내각이 출범되는 유례없는 변칙적인 수단이 동원되었다.

1월 25일 그이는 국민회의 부총재가 된 후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경제 살리기이므로 대미 세일즈 외교를 위해 국회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향했다. 한나라당의 한승수 의원, 자민련의 이태섭 의원이 동행했다. 대표단 자문그룹으로 김종한 변호사, 이경태 산업연구원 부원장, 그리고 로버트 원(Robert Warne) KEI 소장이 현지에 가서 함께 활동하였다.

이 기간 중 뜻밖에 클린턴 대통령과의 만남이 성사되어 그이가 백악관에 가게 되었다. 그이는 IMF 구제금융과 관련한 미국 측의 신속한 지원조치에 감사를 표시하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조기 미국방문이 국빈방문형식이 되기 바란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호감과 존경을 표시하며 국빈방문 형식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 하겠다는 화답을 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조지타운 대학교 동창모임 같다는 인사말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학연을 의식하는 단면이 보이는 대목이다. 하기야 최근에 출판된 클린턴의 자서전에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 후 20명 이상의 예일 동문들을 정부요직에 임명했다고 밝혔다.

대표단은 조찬부터 시작해서 밤늦도록 상하 양원 의원들, 행정부 고위층, 사회지도자들과의 간담회 등 빡빡한 일정을 통해서 12.3 IMF 구제금융조치 이후의 한국경제개혁 추진상황 등을 소개했다. 또 한․미간 경제와 안보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한국에 대한 미 의회의 변함없는 지지를 호소했다고 136 페이지로 된 대표단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DJ가 당선되자마자 각 부처장관의 하마평이 언론에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이에 대해서는 외교부장관 후보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지상발령으로 그쳐온 경험 때문에 신문을 믿지도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 대표는 “외무에 박정수 말고 누가 있나”라고 그이에 대한 평가를 해주었다.
 
▲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기사 (한겨레신문 1998. 2. 26.)

1월 27일, 미 대사관저 파티석상에서 보스워드(Bosworth) 대사가 “장차 외무장관 후보가 이 자리에 몇이나 참석했느냐”고 농담 겸 던진 말에 당시 동아일보의 박권상 씨가 그이를 가리키며 “only one"이라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이가 이끈 대미 의원외교 대표단이 귀국하기 전날 청와대의 김중권 비서실장이 미국으로 전화를 해서 대통령의 방미 준비위원장으로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이번에도 또 장관자리는 “설”로 끝이 나는 것 같아서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 안기부에서 우리 부부 이름을 장관후보 명단에 포함시켜 올렸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절할 듯 펄쩍 뛰면서 내 이름은 당장 삭제하라고 했다. 모처럼, 아니 마지막 일 할 기회가 남편에게 올 찰나에 내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에서였다.

2월 19일 국민회의 출입기자들을 위한 오찬을 마치고 간부들과의 사진촬영을 할 때의 일이라고 했다. DJ 우측에는 조세형 대표와 신낙균 의원이 그리고 좌측에는 정희경 의원과 그이가 서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DJ가 교육신문기자(정희경 의원에게), 외교신문기자(그이를 가리키며), 복지신문기자(신낙균 의원을 가리키며)냐고 농담을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후일 그이는 외교통상부장관으로, 신 의원은 복지부장관으로 임명이 되었고 교육부만이 불발로 끝이 난 셈이 되었다. 그때 대통령은 이미 조각구상을 마친 후였던 것 같다. 정희경 의원이나 이인호 교수 같은 여성이 교육부장관을 한번 맡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으나 불행히도 그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와 관련해서 내부인 기용과 외부인 기용의 장단점이 화제가 되었다. 내부에서 기용되면 파벌조성의 폐단이 있지만 외부에서 온다면 반드시 전문성을 지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과거에 대사직 경험이 있는 청와대의 임동원 수석은 자기는 늘 외교부는 외부인사만이 개혁과 쇄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고 했다. 외무부에 통상기능을 포함시키자는 주장도 임 수석의 뜻이었다고 했다.

모 신문사 정치부장에 의하면 외교부 실국장 밑의 직원들은 강력한 정치인이 장관이 되어 계파를 초월하고 외교부의 위상을 높여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신문사마다 장관후보 명단에 넣어달라는 청탁이 많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리 내외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했고 그이는 5선의원이 되도록 계속 외무위원회에서만 활동을 하며 외무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외무부를 가까이서 지켜본 외교통이었다. 누구나 박정수 하면 외무장관 감으로 보았다. 본인도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외교였고 따라서 상당한 의욕을 갖고 외무부에 대한 개혁안을 구상해 온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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