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마지막 가는 길에 “여기는 걱정 말고 편안히 잘 가세요”라는 말 대신에 “당신 없이 혼자 어떻게 살라고”라고 했던 나의 울부짖음이 마음에 걸려서 당신의 발걸음이 무거웠을 거예요. 미안해요.
당신이 혼수에 빠졌을 때도 기적을 바라던 바보 같은 나는 3년 3개월이라는 당신의 투병기간의 일들만이 지금 내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답니다. 내 가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당신의 고통스러웠던 모습 때문에, 당신을 살려내지 못한 나의 무력함 때문에 당신이 너무 가엾고 내가 너무 미워집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임종 때 아이들을 미쳐 못 부른 것 때문에 당신한테 용서를 빕니다. 처자에 대한 당신의 배려심이 워낙 각별한지라, 전날 밤 성우네가 다녀갔으니 이해해줄 것이라고 자위하지만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원망하고 있어요.
삼우제를 마친 다음 날 발견한 당신의 눈물로 얼룩진 편지 세통은 우리에게 애간장을 녹이는 아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신 편지를 읽고 그저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성우의 가슴도 나만큼이나 아팠을 거예요. 워낙 눈물이 많은 주영이도 연신 휴지로 닦느라고 바빴고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의 편지를 써내려 갈 때의 당신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너무나 가슴이 쓰리고 아파서 그만 눈을 감아버리고 말아요. 성연이가 죽은 후 “머리를 텅 비게 만들려고 노력하라”고 알려준 당신의 비법을 몰랐다면 이런 아픔을 감당할 수 없었을 거에요.‘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고별행사를 간결하면서도 위엄있게 그리고 정중하게 치르려고 신경을 많이 썼는데 당신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부모님 장례식 후 당신이 교회에 장학금을 기부했듯이 나도 당신을 보내놓고 당신 이름으로 경동교회에 장학금을 헌금했습니다. 잘했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아파트로 들어서자 들판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상실감을 당신은 모를 거예요. 당신의 빈자리가 안겨주는 이 슬픔과 허전함은 말로는 정말 표현이 불가능해요. 나의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공기와 같은 당신을 잃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시도 때도 없이 젖어드는 내 눈을 닦아줄 사람이 없잖아요. 연속극을 보며 내가 눈물을 흘릴 때면 “바보같이...”라며 휴지를 꺼내주던 당신이 없어졌으니 내 눈이 마를 날이 있겠어요?
당신이 좋아하던 맑은 하늘의 구름을 볼 때도, 밤하늘의 달과 별들을 볼 때도 거기에 있는 당신을 보고 내 속 눈썹이 젖곤해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도 슬프게 들리고 ……. 이렇게 때와 장소도 구분하지 못하고 체통 없이 구는 나를 당신이 본다면 기가 막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당신이 가고 1년이 되던 날 경동교회에서 추모예배 행사를 가졌어요. 최진호 교수 부인에게 배경음악으로 슈만(Schumann)의 트로이메라이(Traumerei)를 반주하게 했는데 그 음악의 유래를 당신은 기억하나요? 켄터키 대학시절에 한 교수의 장례식장에서 은은히 들려온 트로이메라이 곡이 너무 좋아서 내 장례식 때 들려달라고 부탁했던 곡을 내가 당신 1주기 때 쓰게 될 줄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이런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나요?
또 그날 유학시절 우리가 만났다가 헤어질 때면 당신이 불러주던 쇼팡(Chopin)의 이별곡을, 이번에는 내가 최진호 교수를 시켜 당신에게 불러 주었어요. 그런데 “....떠나가면 나만 홀로 외로움을 어이하리, 언제 다시 만나려나 아....” 대목에서 젊은 날의 당신의 모습이 떠올라 목이 메었어요. 강원용 목사님도 참기가 힘드신지 계속 울고 계셨어요.
|
|
| ▲ 노태우 대통령 특사로 필리핀 외무위원장을 자택으로 방문했을 때 남편과 |
|
이날 당신의 고향 김천에서도 박팔용 시장, 그리고 김종섭 도의원 외 많은 분들이 참석했는데 모두 당신의 부재를 애석해하는 눈물을 흘렸지만 특히 남종회 회장이 어찌나 우는지 옛정이 무서운가봐요.
고맙게도 그 바쁜 반기문 장관과 김경래 장로께서 추모사를 해주셨습니다. 공노명 장관을 비롯해서 역대 외교부 장관님들이 거의 다 참석해주어서 마음이 흐뭇했어요. 설교를 맡으신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님이 “정치인의 장례식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오지만 1주기에 그렇게 많은 지인들이 참석해서 애도하는 예는 본 적이 없다”고 놀라시더군요. 목사님 말씀을 듣고 집으로 오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어요.
2주기 때는 강원용 목사님을 모시고 마침 서울대 초빙교수로 와 계신 큰아버지와 조카들 내외, 김선길 장관, 이어령 장관, 김창성 회장, 이영순 감사 부부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려서부터 당신을 오빠라고 따른 강 목사님의 큰 따님 혜자가 찬송가를 리드해주었는데 이 날도 눈물 참기가 힘이 들었어요.
끝나고 김 회장 내외가 김 장관, 이 장관 내외와 같이 드링크나 하자고 해서 신라 바에 들렸어요. 그곳도 당신과 같이 했던 추억이 베어 있는 장소잖아요. 여자들은 꼬앵뜨로를 주문했는데 한 모금 마시자 내 버릇인 재채기가 나는 거에요. 내가 그럴 때면 당신이 먼 좌석에서도 “또 재채기?”라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보내곤 했던 나만의 추억에 빠졌지요.
외국인 가수 남녀가 노래를 부르는데 당신이 있었다면 분명히 따라 불렀겠지요? 당신이 빠진 채 세 부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니 또 시야가 흐려지더라고요. 당신이 간 후부터는 KBS의 “가요무대”를 볼 수가 없군요. 모든 장르의 노래를 즐겨 부르던 당신 생각에 도저히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거든요.
당신 생전에 언젠가 우리가 탄 자동차가 남산 제2터널을 지나 신라호텔로 꺾어지기 전에 신호등 앞에 멈추어 있을 때였지요. 라디오에서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 나오니까 당신이 “이 노래 좋지?” 하면서 따라 불렀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가고 없는 지금 그 노래도 목이 메어서 따라 부를 수가 없네요. 그래서 서툰 솜씨로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 보기도 해요.
우리 집 피아노를 볼 때면 당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정년퇴임한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나에게 피아노를 사주던 날을 기억해요? 초대받은 곳에서 저녁을 먹고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에 있는 피아노 상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지요. 너무 비싸다고 사양하는 나에게 “우리 피아노는 태섭이에게 주었으니까 다양한 비트에 맞추어 멜로디만 쳐도 되는 전자 피아노를 사면 퇴임도 했으니 시간날 때 치도록 하라”던 당신에게 속으로는 고맙고 감격하면서도 비싼 것을 왜 사느냐고, 김새는 말만 한 것이 이제 와서 미안하고 후회가 됩니다.
남들은 우리 부부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뜻있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다고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해요. 국가이익을 위한 초당외교와 남북통일을 위한 초당적 접근방식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것을 나는 알아요.
그리고 우리 정치에서 여야 간의 몸싸움이나 무리하게 법안을 통과시키는 세련되지 못한 후진적 정치문화가 언제나 지양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것도 알아요. 당신의 그러한 소신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라는 것 알고 있지요? 그래서 당신을 “점진적 개혁주의자”라고 불렀던 것도 기억하리라 믿어요.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코드가 맞는 부부였지요. 그러나 당신이 건강을 잃고 모든 것을 잃게 되자 허무한 나머지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되뇌곤 했을 때 내 심정도 너무나 허탈했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을 떠났어도 많은 사람들이 “아까운 일꾼을 잃었다”고 애도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위로를 받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