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70세면 살만큼 살았는데 유난히 남편 생각을 한다고 유별나다는 눈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늙었다고 감정까지 메마르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의 존재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도 그이가 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느날 식품점에서 우연히 여학교 동기인 유경식과 정영희를 만났다. 남편들이 대구탕을 좋아해서 대구를 사러왔다고 했다. “좋겠다”라고 하는 내 말에 친구들은 무슨 뜻인지 곧 알아채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작년에 김현자 의원님의 금혼식에 초대받아 갔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한 부인이 자기 접시의 반찬을 남편 접시에 덜어주는 장면을 보고 내 곁에 앉았던 황산성 변호사가 “우리는 음식을 나누어 먹을 사람이 없어졌지요?” 라는 말을 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던지는 것이다. 혼자 된 황 변호사나 나에게는 그런 장면까지 부럽게 보이는 것이다.
어느 날 그이의 형님내외가 저녁을 사주신다고 해서 나갔다. 내 앞에 도착한 검은색 자동차가 정차를 하자 뒷좌석의 양쪽 문이 열리면서 한쪽으로는 남편이 또 다른 쪽으로는 부인이 내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그이가 살아 있을 때는 늘 저랬는데... 부러운 생각에 속눈썹이 젖으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분들은 같은 식사모임에 오신 조완규 전 교육부장관 내외였다. 이런 작은 일 하나하나가 나를 바보같이 허전하게 만든다.
함병춘 박사의 부인 심효식 교수가 함 박사가 떠난 20주년 기념으로 “그리움을 담은 그림”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에 가서 아주 오랜만에 심 교수를 만났다. 딸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만 남편을 잃고 종교적 갈등에서 방황하던 나는 심 교수에게 “내세를 믿느냐”고 물었다.
“재학이 아빠를 만나기 위해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믿어지지 않으나 믿도록 노력해요. 그래야 그곳에서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라는 답을 듣고 같은 생각을 하던 차에 위로가 되었다. 함 박사 내외가 잉꼬부부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남들이 부러워했었다.
남편이 가고 없는 세상은 너무나 허전하고 외롭고 허망했다. 살아갈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친구들의 진심어린 위로의 손길이었다. 한동안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찔끔댔으나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싫은데, 내가 자주 눈물을 보이면 그들이 도망갈 것 같아서 지금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이가 떠나고 매일 밤 나에게 전화를 해주는 유일한 친구가 있다. 여학교 동기인 오세임 박사이다. 세임이는 정년퇴임한 피부과 의사이다. 이 친구의 남다른 배려가 나의 슬픔의 일부를 치유해주고 있다.
내가 울다가 전화를 받으면 아이들은 “감기 들었느냐, 어디 아프냐?”라고 묻는데 세임이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지금은 상대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닮은 점이 많다. 체구가 비슷하고 깔끔 떠는 성격도 비슷하고 남편을 하늘같이 여기는 전통적인 사고도 같고 인상도 비슷하다고들 한다.
“성우 엄마는 워낙 잉꼬부부였으니 더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슬퍼말라는 말, “아까운 분이 일찍 떠나서 아쉽기는 하나 너희 부부는 남들이 못 누린 의의 있는 생애를 보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라는 위로의 말들을 듣는다.
“살아있건, 죽었건 한번 그리워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며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말로 위로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수재 전 연대 교수는 미국에서 보내온 편지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한 세상을 뜻있게 그리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정용선 여고 선배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 남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운”이라며 자기도 그런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범준이가 행운아라고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아내의 사회활동을 위해 진심으로 외조를 아끼지 않은 남편과 살았다는 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선배의 말이 다 사실이다. 해외에서의 나의 영문 연설문 교정은 그이의 몫이었다. 연설모드의 조크도 그이가 가리켜주곤 했다.
그이의 연대 제자인 상명여대 행정학과 이왕재 교수로부터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날 부인과 함께 그이 산소에 다녀왔다며 ‘박 장관님의 넉넉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품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고 ‘그런 분을 남편으로 두신 이 박사는 행복하시다’는 글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상주 성신여대 총장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홍구 전 총리 등 몇 분과 골프를 치면서 한∙미 동맹관계가 흔들리는 이때, 대미외교의 베테랑인 박정수 의원이 없어서 아쉽다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준 적이 있다. 유명환 주 이스라엘 대사(지금은 외통부차관)도 ‘여야를 초월한 초당외교를 실천하시고 외무부에 대한 각별한 애착을 갖고 지원해주신 박 장관님의 능력이 아깝다’고 애석해하는 편지를 보냈다.
봉두완 의원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박 장관은 정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으나 깨끗하게 생을 마감한 분”이라고 평가하는 말도 들었다. 김선길 장관은 100일 되는 기일에 “자네가 간 후 어디를 가나 자네를 아쉬워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듣는 내 마음도 뿌듯하다. 왜 그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났는지는 이 다음에 만나서 물어 봐야겠네”라고 산소를 향해서 독백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남편에 대한 평가가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고, 그이가 자랑스러웠다.
정대철 의원 부부는 자기의 선후배, 동료들의 미망인들을 몇 번 초대해서 위로 식사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자상한 배려였다. 그러나 6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는 없다.
그렇다. 우리 부부는 10대부터 친구로, 연인으로, 배우자로, 동반자로, 파트너로 일심동체가 되어 52년간을 동고동락한 사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다행히 그이는 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나에게 남기고 갔다. 이제 그이를 만나러 가는 날까지 소중한 추억만이 나의 벗이 될 것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가까운 친구들은 내가 너무 남편 중심으로 살아왔다는 지적을 하지만 나의 삶의 중심은 나 개인의 출세나 명예가 아니라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이었다. 화목한 가정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일은 스스로 자제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그리고 아들이 결혼한 후에는 며느리와 손자, 우리 가족 구성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정돈된 가정 울타리를 지키면서 사회활동에 바쁘게 지내느라고 우리만의 한가한 시간적 여유를 즐길 겨를이 없이 달려왔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은 여생을 그동안 못해 본 일들을 하며 여유 있게 살 지점에서 남편은 무정하게 이 세상을 홀로 떠나버렸다. 내 생애도 이제 끝이 왔다는 신호라고 생각하고 남편 곁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