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상실
당신이 떠남으로
내 시간의 반을 잃는 줄 알았는데
나의 모든 시간은 텅 빈 공간이 되고
내 추억의 반을 잃는 줄 알았는데
나의 모든 추억에 당신이 자리하고
당신이 떠남으로
내 희망의 반을 잃는 줄 알았는데
당신 없이는 내게 희망이 없고
내 생의 반을 잃는 줄 알았는데
모든 삶의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암으로 아내를 잃고 쓴 윤경희 사장의 이 시가 내 심정을 압축해 주어서 여기에 인용한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완치약’은 못 된다는 것은 죽은 딸을 잊지 못하는 내가 잘 안다. 한동안 앞이 캄캄했다.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 같았다. 죽음보다 더 캄캄한 나날들이었다.
삼우제를 지낸 다음 날 그이 책상 서랍에서 세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하나님께 쓴 그의 편지를 성우 내외와 같이 뜯어보며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의 눈물자국은 내 가슴을 후벼 파듯 통증을 느끼게 했다. 세상과 하직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눈물로 편지를 써내려 갈 때의 그의 심정을 감히 상상하면 할수록 가엾은 생각에 온 몸이 떨렸다.
나를 혼자 두고 그이는 가 버렸다. 아직 홀로 남는 연습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먼저 가 버렸다. 정을 더 붙여 놓고,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들어 놓고 가버린 것이다. 마음 놓고 잡을 수 있는 손, 마음 놓고 묻을 수 있는 가슴, 마음 놓고 안을 수 있는 몸도 이제는 내 곁에 없다.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는 영국 속담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게 되다니….
‘과부가 과부 설움을 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만이 홀로 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나를 아껴주고 사랑한다는 자식도 친지도 나를 이해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나보다 먼저 남편을 잃은 친구들을 보고 그저 막연히 안 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뿐, 혼자 된 사람의 상실감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이가 병원에서 신음할 때도 지금같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누워 있는 남편이라도 살아 있으면 힘이 된다고 했던가?
그이의 잦은 해외 출장과 지역구 활동으로 많이 떨어져 살아온 것이 몸에 배어서인지 나는 아직도 그이가 언제고 돌아올 것만 같다. 남편이 돌아올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다 현실을 깨닫는 순간, 황야에 홀로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남들에게 비쳐진 것과는 달리 유난히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아온 나는 한쪽 날개가 없어진 한 마리의 작은 새다. 날지도 못하고, 날 생각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에게도 문학적인 소질이 있다면,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내 심정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텐데.... 무조건 친구들에게 남편을 소중히 여기고 현재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라는 말밖에 해 줄 수가 없어 안타깝다. 나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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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수 전 외교총상부장관 가족묘 /왼쪽부터 김영재 교수, 김경래 장로, 김선길 장관 내외, 강인숙 교수, 필자, 김정례 장관, 아들 내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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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형체가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다. 서서 양말을 신을 때면 “앉아서 신어요. 허리 다친다니까. 왜 말을 안 듣지?”라는 남편의 음성이 또렷이 들린다. 그러면 즉시 의자에 않는다.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먹으려고 하면 “가만히 누워 있으면 저절로 잠이 오게 되어 있는데 왜 자꾸 약을 먹으려고 하지?”라는 남편의 음성 때문에 멈칫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직 남편의 말을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설탕 봉지를 두개나 뜯으면 “설탕이 그렇게 해롭다는데 기를 쓰고 설탕을 많이 먹으려고 하네. 그리고 커피를 많이 마시면 골다공증에 걸린다니까”라는 남편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면 나는 두 번째 설탕 봉지를 내려놓고 커피는 반잔만 마신다.
아침에 치아를 닦을 때 마다 “너무 빡빡 닦으면 치아가 손상된다는 것 모르나?”라는 그의 경고를 듣는다. 그리고 칫솔에 가하던 힘을 뺀다. 시간대마다 “목 운동했어?” “약 먹었어?” “오늘 물 많이 마셨어?” 챙겨주던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한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보다 그의 말을 더 잘 듣는 아내로 변해버린 것이 신기하다.
그이 산소에 매달 한 번씩 가서 잡초를 뽑을 때면 “몇 푼 든다고 허리 아프게 일을 하지? 사람을 쓰지 않고” 라는 그의 음성이 들리고, 싫어하는 표정이 보인다.
시댁은 기독교식으로 산소에 가서 예배만 드리고 음식을 가져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남편 산소에 그이가 좋아한 팥빵을 갖다 놓는다. 그럴 때면 그이가 “난 그런 것 싫다니까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라고 짜증을 낼 것 만 같다. 그래도 내 기분 때문에 그이가 생전에 좋아한 것들을 가지고 가게 된다.
꽃밭을 만들려고 철쭉꽃, 영산홍 등을 산소 옆 공지에 심고, 성연이와 그이의 석상에는 색색의 조화 바구니로 장식한다. 그것만은 평소에 꽃을 좋아한 그이가 잘했다고 칭찬해 줄 것 같다. 그이 곁의 성연이가 “엄마는 아빠만 좋아해”라고 샘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남편 쪽으로 먼저 가서 오래 대화를 하게 되니 말이다.
응접실에 있는 그의 큰 영정을 향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나를 두고 혼자 가버려서 밉다고, 오랫동안 투병으로 고생한 것이 가엾다고,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외롭다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후회한다고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시야가 흐려진다. 그러면 그이의 사진은 “울지 말어” 하고 표정이 바뀌는 것 같이 보인다. 가끔 내가 정신 이상인가 했는데 다른 미망인들도 다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한 동안 내 눈이 마르지 않자 친정 언니가 “네가 너무 울며 매달리면 네 남편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못가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하니까 빨리 놔주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이보다 1년 후 작고한 허주(김윤환 의원)의 부인은 통화를 하다가 울어버린 나에게 “고인들은 우리가 우는 것을 원치 않을 거에요”라고 의연하게 위로해 주었다.
작년에 여학교를 졸업한지 52년 만에, 바깥바람을 쐬라는 친구들의 권유로 처음으로 동기생들 따라 일본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Welcome home! Mom"이라는 남편의 목소리가 내 귀에 울렸다. 순간 황당했다. 내가 꿈을 꾸나? 어떻게 그이의 음성이.... 잠시 말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성우냐?“ 하니까 “Who else (저 말고 누구요)?”라는 것이다. 순간 아버지로 착각을 했다고 설명했더니 “왜 엄마가 잠시 조용한가” 하고 의아했다며 “아버지가 나를 통해서 말하신거에요"라고 익살을 떤다.
그이도 영어로 나를 Mom이라고 불렀고, 내가 외부를 다녀올 때면 하던 말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부자가 목소리도 같고, 말하는 억양도 같아서 착각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내가 환청 증세까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환청이라 해도 내 귀에 들어온 그이 음성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음미하려고 애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