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그이가 혼수에 빠지자 29년 전 딸아이가 혼수에 빠졌을 때의 절망감이 다시 살아났다. 형벌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에 그동안 매달렸던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때 장만한 새 면도기로 면도도 해주고 손톱 발톱도 깎아주면서 앞으로 못 보게 될 남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통증이 오기 전에는 평화롭게 잠자는 모습이었다.
그이가 앓는 소리를 하던 날, 너무 가엾어서 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손을 잡아주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편지를 들었다. 세 명의 어린 자녀를 두고 남편을 갑자기 교통사고로 잃은 후 16년 동안 혼자 아이들을 길러 고1, 고3, 대2가 되었는데 이제 자기가 암에 걸렸다며, 죽은 남편에게 쓴 편지 내용이었다. 읽는 아나운서도 울고 듣는 나도 울었다. 그런 여자의 일생에 비하면 나의 눈물은 사치라고 자위하면서도, 남편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집으로 오자마자 장례식에 쓸 찬송가를 틀어놓고 대성통곡했다. 소리 내서 울어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시원하기는커녕 몸은 떨리고 눈은 쓰라렸다. 남편이 아직 살아있는데도 그의 빈자리를 벌써 느끼다니! 밤 10시만 되면 “약 먹어!”라고 챙겨주던 남편! 내가 아프면 근심어린 표정으로 “약 먹었어?” 하던 그의 음성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운명하기 4일 전 그의 김천국민학교 동기인 권상능 사장 부인과 이어령 장관 내외가 다녀갔다. 그리고 임수현 사장이 대구에서 올라왔으나 남편의 초라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꼭 형님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다고 해서 병실로 안내했다.
눈물로 기도를 해준 임 사장이 남편이 이 세상에서 만난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임수현 씨는 김천 후배로서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선거 때마다 대구 송설(김천중학교) 동문들을 버스 여러 대에 태우고 김천으로 와서 자기 일 같이 열렬히 선거운동을 해준 공로자이다.
마침 그이의 보좌관이며 나의 제자인 정민자가 전화를 했다. 자기와 김영재 교수가 병실을 방문했을 때 “박 장관님께서 이 박사가 힘들 테니 많이 도와주라”고 신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장례식 순서에 조사는 ‘보내는 말’로 해서 이어령 장관님께 부탁하기로 하고 찬송가와 주기도문은 테너인 임수현사장의 아들 임삼 씨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고인의 약력 소개는 ‘고인의 발자취’로 하고 유재건 의원에게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오세임, 강인숙, 정민자와 수시로 전화 연락을 하면서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추스리며 장례식 준비를 했다.
새벽 3시까지 남편의 비디오와 연설 테이프를 틀어서 듣고 보면서 장례식에서 쓸 부분을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한편 세임이가 그이의 파자마와 가운 그리고 하얀 시트를 병실에 갖다놓고 운명하면 갈아 입히라고 했다. 이 조언이 얼마나 나중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며늘아이와 나는 상복을 맞췄고 태섭이는 중3 학생이라 기성복을 구입해 놓았다.
그이가 떠나기 전날은 초봄의 화사한 날씨였다. 자기는 고통스러워도 우리가 고생하지 않도록, 꽃봉오리가 돋아나는 따뜻해질 때를 기다렸나보다.
3월 23일은 일요일이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병실을 지키다가 네 식구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내가 밤을 새울 테니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도 세 아이들이 아버지 곁에서 오래 머물며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태섭이는 끝까지 할아버지 손을 잡고 있었다. 병실이 협소해서 우리 모두가 다 있으면 간병인이 힘들 것 같아서 아이들을 보냈다.
일요일을 넘기려고 그이는 용을 쓰는 것 같았다. 결국 2003년 3월 24일 월요일 새벽 4시, 남편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곳, 하나님 곁으로 떠났다. 남겨둔 가족이 못내 걸리는지 감은 그의 두 눈에서는 쭈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들을 부를 겨를도 없었다.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고통없는 나라로 가는 중이었는지 평화롭게 잠든 남편의 얼굴은 나의 눈물로 젖어갔다.
무너지려는 나를 추스러야 마지막 헤어지는 남편을 명예롭게, 아름답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순간 냉정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끝까지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남들은 나를 독한 여자라고 했을 것이다.
즉시 그이가 즐겨 입던 깨끗한 파자마와 가운으로 갈아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니 잠든 사람같이 보였다. 다행히 그때 아이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빠의 잠든 모습을 보고 “주무시는 것 같다”며 성우는 아버지 입술에 고별의 키스를 했다. 마지막 가실 때 왜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원망했다. 대꾸할 겨를도 없이 며늘아이를 데리고 삼성에서 보내준 운구차에 그이를 싣고 먼동이 트기도 전에 서울거리를 달렸다. 그것이 남편과의 마지막 드라이브가 되었다.
늘 남들에게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지요”라고 죽음에 대해 의연함을 보여 온 남편은 마음에 걸리는 아내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하나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담당 간호사가 “장관님은 대단하세요. 그 정도의 통증이면 환자들이 병실이 떠나가라고 소리치는 것이 보통인데 끝까지 조용히 참아내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보기 드문 환자입니다”하고 말했다.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 이제는 고통도 끝이 났다. 하늘나라에는 아픔도 고통도 없을 테니까….
수의를 입혀도 남편은 멋지게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차디찬 뺨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남겼다. 우리는 살면서 ‘마지막’의 의미를 다양하게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사람과의 마지막 이별은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절망과 암흑 그 자체였다.
장례식은 외교통상부장으로 치러졌다. 강원용 목사님이 감정이 복받혀 도저히 예배인도를 못하시겠다고 해서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님이 맡아주셨다. 조문객들이 화장터와 산소까지 따라간다는 일은 큰 폐가 되니 장례식장에서 고별인사를 하도록 하자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박 목사님이 그렇게 광고를 했다.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나는 길목에서 조차 세세한 구석까지 신경을 쓰며 남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승의 개가 죽으면 초상집이 붐비고 정승이 죽으면 초상집이 한가하다’는 옛말은 그이의 빈소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빈소를 찾아주신 그 많은 조객들을 일일이 만나 뵙지는 못했으나 모두 그이의 죽음을 진심으로 아까워하고 애석해 하는 것을 보고 인심을 잃지 않은 남편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많은 분들이 오셔서 “박 장관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인사를 해주었다.
강영훈 총리께서는 두 번씩이나 빈소를 찾아주시며 “차라리 외무장관을 하지 않았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하며 울먹이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