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마지막 날. 성우가 병실로 왔기에 둘이서 병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보통날은 창밖이 환하면 눈을 꼭 감고 있다가도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나에게 누워서 쉬라고 하고, 창밖이 깜깜해지면 빨리 집에 가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성우 말이 아버지는 잠자는 듯 눈감고 있다가도 우리들의 얘기를 모두 듣는다는 것이다. 목이 아프다고 하면 갑자기 눈을 뜨고 “이비인후과에 가봐야지!”라고 말하고 또 눈을 감는다. 정신은 말짱한데 눈 뜰 기운도, 말할 기운도 없는 것이다.
그이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병실을 떠나면서 성우가 아버지를 안으며 “Happy New Year!" 했고, 그이도 뭔가 말하는 것 같았는데, 성우는 눈물을 감추려고 앞서서 걸어갔다.
차안에서 물어보니 아버지가 울먹이면서 ”John, I've done all I could do. I did my best. I'm sorry, son. You carry it on for me. Please take good care of your mom. I'm really sorry. (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최선을 다 했지.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 나 대신에 네가 이어나가라. 부디 엄마를 잘 보살펴 주기 바란다. 정말 미안하구나)”라고 해서 눈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모자는 눈물 젖은 가슴으로 말없이 귀가했다. 불과 3년 전까지도, 연말이면 온갖 좋은 형용사를 외치는 아버지의 선창에 따라서 목청을 높였는데...... 2002년은 그렇게 쓸쓸하게 저물어갔다.
2003년 새해 아침, 먹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아침 일찍 떡국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 물론 먹지 못했다. 그이는 침대에 앉은 상태에서 세 아이들의 세배를 받았다. 나도 지쳤는지 자주 찾아오는 감기로 항생제, 타일레놀, 소염제, 소화제 등을 입에 달면서 병원과 집 사이를 드나들었다.
정초부터 혈소판이 2만으로 떨어졌다며 수혈을 해서 헤모그로빈을 올리고 혈소판 주사도 맞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그이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조금이라도 먹어야 산다는 말에 “조금 있다가” “나중에”라고만 하고 먹지를 않았다.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니 간병원이 내 귀에 “장관님께서 이 박사님이 가엾다고 눈물을 흘리셨어요”라고 속삭였다.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엾은 사람은 자기인데 누구를 가엾다고 하나…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넘쳐 나왔다. 그이가 너무 가엾어서….
마지막 가는 길에 무엇이든지 최고급으로 해주고 싶은 생각에 비단 이불을 두 채 맞추어서 번갈아 덮게 했다. 면도기도 지난 크리스마스 날 독일제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사서 선물로 주었다. 그이는 “얼마나 산다고 면도기를 새로 샀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좁쌀 미움, 호박죽, 팥죽, 녹두죽, 기름 뺀 고기나 닭 국물에 브로콜리, 감자 등 야채를 삶아서 간 것을 번갈아 주었다. 조금씩 밖에 못 먹는 데도 다시 회복이 되어갔다. 신기했다. 우리는 주사기를 꽂은 채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걷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 먹고도 걸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이력서를 갖고 오라고 했다. 자기의 죽음을 준비하는 수순이었다. 몇 달 전부터 자기 옷과 소지품을 남에게 나누어준 것을 시작으로, 누워서도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없나 하는 생각만 했나보다.
부르는 대로 이력서를 써내려 가다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현직은 새천년포럼 이사장, 민주당 고문이라고 할까”라고 물었다. 그이는 “죽은 사람이 무슨 현직이 있어?”라는 것이다. 둘이서 한참 웃었다. 죽음을 앞두고 우리부부같이 천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부부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고 남편을 안아주며 웃어댔더니 자기 곁에 누우라고 했다. 우리는 잠시 나란히 누웠다. 남편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적 같은 짧은 외출
그이의 컨디션이 기적적으로 정상으로 돌아온 듯해서,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며칠을 지냈다. 연초부터 김 박사가 젤로다를 복용하게 한 것이 효험을 봤는지 지난 연말에 비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날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1월 말, 구정 전 걸어서 병원을 나왔다. 그저 식사만 잘 하면 살아날 사람같이 여겨졌다.
퇴원해서 꼭 열흘간 집에 있는 동안 여전히 먹는 문제가 보통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먹게 하려고 심리전까지 동원해 보았다. 작은 그릇에 담아서 많다는 느낌이 안 들게 한다든지, 큰 그릇에 담아서 음식이 적다는 느낌을 주려고도 해보았지만 속에서 안받으니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구정 연휴에 찾아온 제자들, 외교부 사람들, 친구들, 조카들과는 응접실에 앉아서 얘기할 정도의 정신력을 발휘했다.
우리는 양력을 새서 구정을 지내는 사돈댁에 아이들을 보내고 손님들이 가면 조용해진 집을 지켰다. 집에 있는 동안 다시 발이 붓기 시작했다. 산모의 부기를 없앨 때 늙은 호박 삶은 물이 효과가 있다 해서 늙은 호박을 달여서 주었다. 산모의 붓기와 암 환자의 붓기는 같을 수 없지만 무엇이든 해보고 싶었다. 세상에는 기적이나 요행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2월 9일 그이의 71세 되는 생일이었다. 친정 언니가 환자의 생일은 크게 차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고 며늘아이가 차려놓은 저녁을 같이 했지만 그이는 먹는 흉내만 냈다. 케이크를 자르고 성우 내외와 태섭이의 카드를 읽고 나더니 우리를 한 사람씩 안아주는 것이다.
나를 안아주며 “수고가 많아. 미안해”라고 하고, 성우에게는 “이젠 네가 가장이다” 등 길게 이야기하면서 그의 눈은 서서히 젖어왔다. 며느리 주영이를 안아주면서 “네가 가족의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한다”고 하더니 마지막으로 손자를 꼭 안고 “너는 우리 가문의 희망이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애써 분위기를 돌려보려고 화제를 바꾸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게 쓴 카드를 읽어보고 그 내용이 그의 감정을 폭발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