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치료법 이후: 10월 21일 김 박사가 앞으로는 암세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다만 성장을 지연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며 두 주일에 한 번씩 그동안 사용한 네 가지 약을 동시에 써보자고 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 순간이었다.
그이는 “하나님께 매달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늘에서 오라면 가야겠지” “그래도 재작년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3년은 더 살지 않았나” “다만 성우가 직장에서 뿌리를 박는 것을 못보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진로문제는 앞으로 제 장인 어른과 의논을 해야겠지” “당신이 가엾고 안됐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가는 길이 아니겠느냐”고 그동안 말이 없던 그이가 그 날은 이런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니까 “아직도 눈물이 남았어?”라고 묻기도 했다.
그는 한 가지 소원은 “50주년 결혼기념일을 같이 보내고 싶었고 당신의 고희라도 같이 지내고 싶었는데 그것도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을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너무 가엾어서 나는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죽고만 싶었다.
속수무책인 내가 미웠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내가 싫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너무 일찍 포기하지 말라”는 말만 하고 눈물을 감추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의사의 절망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그이는 나에게 자기 생각을 많이 털어 놓았고, 아이들과 식사를 할 때도 그전보다 말을 많이 했다. 아들 내외에게 “지나온 날을 생각해보면 부부간에 쓸데없이 싸우는 것 같이 어리석은 일이 없다. 작은 일로 싸워서 나중에는 엉뚱하게 비화되고 서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처를 주는 짓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했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무엇이든지 버리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주변정리를 깨끗이 하고 사는 습관을 기르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평생 주식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이는 아들에게 소탐대실하지 말고 주식투자와는 거리를 두라는 당부도 했다. 마치 유언이나 하듯이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위로할 말을 끝내 찾지 못했다.
새로운 치료방법이 조금은 효과가 있는지 11월에 가서는 퉁퉁 부었던 발도 붓기가 빠지고 통증도 가셨다. 그래서 한갑수 장관과도 회식을 하고 배순훈 장관 댁으로도 가서 이규성 장관 내외, 한덕수 수석 내외와 함께 즐거운 저녁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주한 미 대사관의 리쳐드 크리스텐슨 부대사가 주일 미 대사관의 부대사로 부임한 후 그이의 소식을 듣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hyung nim (형님)! 웬일이세요?”라며 남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11월 말에는 한승주 전 외무장관을 모시고 “기로에 선 제네바 합의”에 관한 새천년 포럼 간담회에도 참석을 했다. 그날 점심도 봉두완 의원 초대로, 저녁은 새천년포럼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고 있는 박현숙 사장의 초대로 밤 10시까지 그이가 버티는 것을 보고 정말로 놀랐다. 그 날의 새천년 포럼 행사가 그에게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12월에는 다시 백혈구가 떨어지고 열도 나고 심상치가 않았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항암주사를 24시간 맞으면 늘 혼자 샤워를 하고 걸어 나왔으나, 차차 혼자 샤워하기가 힘들어지더니 양말과 바지를 혼자 입을 힘이 없어서 도와주어야 했고, 팔을 잡아주어야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게 되었다. 다음에는 휠체어를 타고 자동차 앞까지 갈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다.
앞으로는 자라고 있는 암세포를 줄일 수 없다는 김 박사의 말을 들은 후부터 그는 자기 물건들을 정리하려고 조바심을 냈다. 넥타이도, 양복도, 운동복도 남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넥타이는 아들, 조카, 기사에게 나누어주고 몇 개만 남겼다.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때마다 내가 사준 타이가 그동안 많이 쌓여 있었다. 양복도 아들이 아버지 체격과 비슷해서 몇 벌을 주고 그대로 걸어 놓았더니 왜 남겼느냐고 성화였다. “누가 죽은 사람 옷을 좋다고 받아가겠어. 머리를 써야지” 라며 내일 갈 사람같이 나를 독촉했다.
죽음 앞에서 그렇게 담담할 수가 없었다. 유머 감각도 죽지 않았다. 스웨터를 정리하면서 내가 “라운드 형, 브이 형, 가디간 등 종류별로 당신을 멋지게 입혀 골프장에 가려고 마련해 놓았는데...”라고 하자 “내가 없어지면 다른 남자에게 입혀서 멋진 사람과 같이 골프치지 그래”라며 웃었다. 성우가 그 말을 듣고 “그 멋진 남자는 태섭이가 될 거에요”라고 응수했다.
12월 중순부터 식사량이 더욱 줄었다. 자꾸 권하면 “나를 편하게 보내줘” “너무 먹으라고 보채지 말고 내버려둬”하며 사정했다. 아직도 일할 나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남편의 일생이 이렇게 허무하고 아깝게 끝나게 되다니.... 위가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물이 주책없이 흘렀다.
잠든 남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응접실 소파에 누워있는데 아줌마가 가요무대를 틀어놓았는지 구성진 옛 유행가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사진을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영정 사진으로 쓸만한 것이 없었다. 겨우 그이가 미소를 짓고 찍은 사진을 하나 골랐다.
그이가 세상을 떠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준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남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드리고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면 오히려 오래 산다는 미신도 믿고 싶었다.
나는 그이에게 우리 부부의 영정 사진을 맡기려고 한다며 내가 선택한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그중의 하나를 골라서 사진관에 맡겼다. 며칠 후, 액자에 넣은 영정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남편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우리 두 사람의 영정 사진을 서재에 잘 모셔두었다.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자 영양주사라도 맞자고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했다. 김 박사가 진찰을 하더니 복수 때문에 식사를 못한 것 같다며 처음으로 복수를 뺐다. 혹시 주사바늘이 다른 장기를 찌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복도로 나가 있었다.
그이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척추에 주사바늘을 꽂을 때 울지 않았던 성연이가 생각났다. 아빠를 닮은 것이다. 복수를 빼니까 속이 편하다며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타나는 증세들을 임시변통으로 완화시키는 길밖에는 없는 단계에 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