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이 같은 성품은 한국적인 정치풍토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모 외교부 간부가 지적했듯이 20여 년간의 경력을 가진 정치인답지 않게 ‘순수’했고 늘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시부모님의 가르침을 쫓아 살았던 사람이다. 계략이나 음모나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지위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대하며 남들을 자기 같이 믿는 사람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험난한 정계에서 어떻게 버티어왔는지 아내인 나도 궁금할 정도다. 하기야 그러니까 정당의 요직에서는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의 여유있고 민주적이며 열린 마음을 가진 성품 때문에 외교사절단과 아랫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인기를 끌었다고 본다. 예를 들자면 작은 일이지만 외무부에 가보니 실 국장들이 결제를 받기 위해 장관실 밖에서 모두 서서 기다리는 것이 안쓰럽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앉아서 편하게 대기하게 했다고 한다.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이며 경직된 분위기를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꾸고 싶었다고 했다. 장관과 아랫사람들과의 격의를 메우고 싶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러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고 그이에게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이는 무척 통이 크고 너그러운 성품이었다. 예를 들면 그가 외교부 장관에 취임하자 다른 장관 후보를 지지한 간부들이 신임 장관이 자기들을 교체하지 않을까 염려를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임 장관이 임명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을 교체할 의사가 없으니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독려했다고 한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어델 가나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을 포용해서 지지자로 바꾸어 놓는 소질이 있어서 늘 그렇지 못한 나는 남편의 그런 장점을 배우려고 애썼다.
그이는 외교부에 대한 개혁안을 갖고 있었다. 내가 다 알 수는 없으나 몇 가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외교관이 공관장으로 부임하면 3년 이상은 복무해야 하고 국장들도 전문성을 쌓을 때까지 일정기간의 복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또 본부 국장을 지내지 않아도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맡을 수 있게 해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야겠다는 말도 들었다.
주한 외국 대사들은 적어도 4년 혹은 재임까지 해서 한국에 대한 전문인이 되는 추세에 반해 우리 외교관들은 6개월만에도 소환되거나 다른 부서로 옮기는 전례가 허다했다. 소위 ‘빽’ 좋은 사람이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곳 공관장은 임기가 되기도 전에 소환되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한 국가의 공관장으로 부임하면 적어도 1. 2년 걸려야 그 나라의 사정을 겨우 터득하게 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사귀게 되는 법인데 근년에 와서는 3년 채우기가 힘들다는 불평을 들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외교가 제대로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관수가 줄었다고 해서 공관장의 임기를 단축시킨다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그 손실은 엄청나다고 그는 우려를 했다. 외교관들이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자녀교육 문제, 집 처리 문제 등을 임기 마친 후에 돌아올 예정 하에 준비를 해놓고 떠나게 된다. 그런데 임기도 되기 전에 갑자기 본국으로 소환 발령이 나면 이미 전세를 주고 떠났기 때문에 갈 집도 없고 자녀 학교문제도 공중에 떠 버리는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잦은 외교관 교체가 외교의 일관성, 효율성, 계속성, 전문성을 떨어뜨리며 재정적 손실도 막대하다는 것이다. 일본과 같이 외교공무원 충원수를 줄인다든지 해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방법을 강구해야지, 모두 받아놓고 자리가 없다고 1년짜리 공관장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라며, 휴스턴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걱정을 했다.
또한 본부 국장을 지내야 승진에 유리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외교보다는 본부국장 운동을 위한 내교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밖에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재외 공관 및 대사관 건축 문제 검토 등 개혁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젊은 외교관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지연, 학연관계로 ‘특혜도 주지 않지만 그 때문에 불이익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한승주 외무장관 시절 특정 고등학교 출신을 많이 기용한다는 비판이 있어서 그이가 알아보니까 “학력사항을 보지 않고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 승진 명단을 작성하고 보면 특정 학교 출신일 때가 많다” 고 한 한 장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사적재 해소와 젊은 중견 간부들의 길을 열어주는 방법으로 공관장을 3회 이상 할 수 없게 한 것도 이때인 것 같은데 이 점에 대한 평가는 잘 모른다. 남편이 남긴 98년 4월 20일 첫 공관장회의 개회사 메모지에는 6・25 전쟁 이후 최초의 국난 (IMF 사태)에 직면한 만큼 외자유치와 수출증대를 위해 발로 뛰는 세일즈맨 공관장과 공관원이 되어달라는 부탁과 앞으로 1, 2, 3급지 개념도 없애고 실적위주로 평가하고 배치하겠으며 해외 연속근무 제한도 철폐할 용의가 있다고 쓰여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이는 미국, 일본, 중국이라는 3강 외교의 정지작업을 성공리에 마쳤고 외무장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까지 쌓게 되었다. 만일 정보원 맞추방 사건만 없었어도 러시아와의 관계도 원활하게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도 프리마코프 외무와도 개인적으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 확실하다. 정치적으로 큰 사건을 벌려 놓은 후 프리마코프가 우리를 대한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외교부 간부들을 만나면 모두 박 장관이 그 짧은 기간에 미, 중, 일, 몽골, 베트남, 홍콩 등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정지작업을 탄탄히 해놓은 결실의 덕을 보고 있다고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외교부에 대한 각별한 그의 애착심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외무위원회에서 그의 후임자가 몰릴 때마다 감싸주고 다른 의원들을 설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사례들이 많이 있었다.
최근에 화제가 된 이중국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이의 의견은 개방적이었다. 500여만 명이라는 우리 교포의 규모는 세계 네 번째이며 남한 인구의 10%나 된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1천5백만 명, 중국화교가 2천2백만 명, 이태리 민족이 5백5심만 명이다. 우수인력을 확보하고 이들의 잠재력을 국가발전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좀 더 오래 외교부에 남아 있었다면 이 문제에 대한 연구에도 전향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북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대화를 촉구하면서도 굳이 구걸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무조건적인 친북 입장이 아니라 남북관계도 주고받는 관계, 논 제로섬 관계, 상식이 통하는 관계,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의 관계유지가 장기적으로는 북한에도 이롭고 국내적으로도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 그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 해결책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책” 이라는 입장이었다.
